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다음달 초 의회에 상정할 유럽연합(EU) 탈퇴협정 법안의 얼개를 21일(현지시간) 공개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주요 쟁점에 관한 각 정파의 입장을 조금씩 수용해 절충을 꾀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미흡하다’,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반발만 거세져 오히려 총리 리더십만 또 한번 크게 훼손됐다는 평가다.
메이 총리는 이날 런던에서 한 연설을 통해 “합의하에 브렉시트를 완수할 마지막 기회”라며 법안에 담긴 10가지 주요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먼저 EU 탈퇴협정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다면 제2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원이 요구할 경우 법안의 최종 승인 여부를 국민 의사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2016년 브렉시트를 명령한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해 온 메이 총리가 제2 국민투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그는 이밖에 △북아일랜드 ‘안전장치’(backstop) 가동 최소화를 위한 대안협정 마무리 시한(2020년) 법제화 △상품 분야 일시적 EU 관세동맹 잔류와 ‘촉진된 관세협정’ 중 의회 결정 수용 △EU 수준의 노동권, 환경보호 기준 유지 등을 약속했다.
메이 총리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브렉시트당이 보수당을 압도할 것으로 예측되는 현 상황을 의식한 듯 “교착 장기화는 양극화된 정치의 악몽 같은 미래로 가는 문을 열어줄 뿐”이라고 새 법안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마음을 돌리려던 메이 총리의 계획은 실패했다고 BBC방송은 진단했다. 제1야당 노동당과 북아일랜드 보수정당 민주연합당은 ‘재탕’, ‘누더기’ 법안이라고 혹평했다. 브렉시트 자체에 반대하는 스코틀랜드국민당도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제2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의원들 역시 “이런 수준의 불확실한 약속으로는 미흡하다”며 법안 반대 입장을 밝혔다.
집권 보수당 내 여론은 더욱 험악해졌다. 지난 3월 말 하원의 제3차 브렉시트안 표결 당시 정부안을 찬성했던 의원들조차 “총리가 제2 국민투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자기부정이자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며 새 법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에 보수당 내 브렉시트 강경파는 “브렉시트로 분열된 당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마음을 모으는 위대한 일을 메이 총리가 해냈다”고 비꼬았다.
메이 총리는 더욱 전향적인 국민투표안을 내놓으려 했으나 내각 반대에 가로막혔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이날 보수당에서는 “바로 지금이 (총리가) 떠나야 할 때”, “새 당대표 선출 과정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불만이 분출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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