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탔다. 그 날의 참혹함은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숭례문 현판이 십 수 미터 아래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극에 달했다. 현판의 글씨 부분이 크게 훼손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복원이 필요했다. 제대로 들여다보니 화재로 인한 훼손 외에도 상처가 많았다. 6·25전쟁 당시 총알에 맞아 뚫린 구멍에다 포탄의 파편이 박혀 있었고, 온전한 하나의 판이 아니라 38조각을 땜질하듯 붙여 놓은 것도 발견했다. 무엇보다 글씨의 변형이 확인됐다. ‘崇’(숭)자와 ‘禮’(례)자의 획, 폭, 연결 등이 원래와 달랐다.
현판 글씨의 변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원형’ 역할을 한 것이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곳)의 현판 탁본이었다. 현판을 쓴 것으로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후손 이승보가 1865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악의 참사를 겪고도 1년 넘는 복원 작업 끝에 국보 1호 숭례문의 현판이 오히려 제대로 된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일은 문화재 보존·복원에서 원형이 가지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판 글씨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다른 버전의 문화재가 도난을 당했다 회수된 것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전남 담양 몽한각(태종의 5대 후손이 이서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에서 도난당한 ‘숭례문 목판’ 2점을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숭례문이 불탔던 그 해의 9월 도난을 당했으니 11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문화재청은 “1827년경 양녕대군 후손들에 의해 새로 새겨져 몽한각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숭례문 현판 글자를 판각한 현존하는 유일한 목판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는 “피의자 A씨는 목판을 야산의 비닐하우스에 숨겨두었는데, 2013년경에 500만원 주고 샀다고 진술했다”며 “절도 공소시효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처분, 유통하려다 적발됐다. 절도로는 처벌을 못하지만 문화재 은닉 혐의로 처벌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의 것이며 그의 동생인 세종이 재위할 당시인 1400년대 초반에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400년이나 지난 1800년대에 제작된 목판, 탁본이 양녕대군이 쓴 글씨와 같은 것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게다가 숭례문이 1396년 창건된 이후 몇 차례 보수를 거치기도 했다. 그러나 화재 후 복원 과정에서 현판이 1474∼155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연대측정법 결과 확인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목판, 탁본이 1400년대 제작된 현판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다. 또 현판에 주로 쓰인 서체가 엄격하게 계승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정제규 문화재전문위원은 “현판 글씨는 ‘설암체’인데 고려말부터 조선까지 편액 글씨로 주로 활용돼 ‘액체’라고도 불린다”며 “목판의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는 근거”라고 설명했다.
목판과 함께 19세기 중반 양녕대군의 유묵으로 인식되어 판각된 ‘후적벽부 목판’ 4점이 회수됐다. 또 보물 100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국전도’(萬國全圖)와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류 필사본 116책을 되찾아 모두 123점의 도난문화재를 회수했다. 만국전도는 1661년 채색, 필사한 것이다. ‘곤여만국전도’,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동국지도’와 함께 현존하는 3점의 필사본 세계지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993년 9월 도난당했던 유물”이라며 “국가지정문화재라는 걸 알면서도 1300만원에 거래가 되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강구열·김승환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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