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4일부터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동했다.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일본산 소재·부품에 대한 것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이번 조치가 "명백한 경제보복"이라고 비판하면서 "반드시 상응조치를 하겠다"고 나서 우려했던 대로 두 나라 간 갈등은 이제 한 단계 더 고조됐다.
이번 문제가 처음 불거진 지 며칠이 지났지만 양측의 입장은 강경 일변도로 흐르고 있다. 해법을 마련하기보다는 '한번 붙어보자'는 식이다. 지금까지는 일본이 더 강경한 자세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3일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우대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조치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역사 인식문제를 통상정책과 관련시키는 것은 양국에 좋지 않다는 자국 언론 지적에 대해 "그 인식은 확실히 잘못됐다"고 반박까지 했다.
우리의 대응은 아직은 수위가 그리 높지 않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 시점에서 주목되는 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조짐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불매운동' 주장 글이 올라오고 있다.
도요타·렉서스·혼다·소니·파나소닉·캐논·데상트·유니클로·ABC마트·아사히·기린·삿포로 맥주 등 불매제품 리스트에 구체적인 자동차, 전자제품, 의류, 맥주 등 다양한 일본 브랜드가 올라가 있다. 일부 트위터 이용자들도 리스트를 공유하고, 참여를 독려한다.
청와대 게시판에도 '일본 경제 제재에 대한 정부의 보복 조치를 요청한다'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물론 아직 크게 확산한 것은 아니지만 두 나라 간 무역보복이 확전 양상으로 갈 경우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짐작하게 한다.
자국 정부에 대해 어지간하면 쓴소리를 하지 않는 일본 매체들이 이번에는 거의 한목소리로 이번 경제보복 조치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자국민을 위해 옳지 않은 정책을 펴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4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빌미로 일부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계획대로 단행한 가운데, 이로 인한 국내 IT업체들의 생산 차질은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번 규제가 일본 수출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당장 국내 업체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IT 업계에서는 한일 양국이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치 양상을 보이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번 규제로 일본 기업의 수출 심사에 통상 90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의 압박이 강해질 경우 더 길어질 수도 있으며, 의도적으로 심사를 통과시키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에서다.
일본 정부가 군사전용 가능성이 있는 품목에 대해 허가 신청을 면제해 주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고 수출 규제 대상 품목을 확대하는 등의 추가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는 가운데 기업 입장에서는 별다른 대응 방안이 없다는 점에서 공포감은 더 커지는 형국이다.
이번 수출 규제에 대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고,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글로벌 전자업계로 파장이 확산할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기 해결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수출 규제' 日 내부에서도 비판 여론…사태 조기 해결 가능성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해 "명백한 경제보복"이라고 비판하고, 일본이 규제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상응한 조치를 반드시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본은)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강제징용에 대한 사법 판단에 대해 경제에서 보복한 조치라고 명백히 판단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보복 조치는 국제법에 위반되기에 철회돼야 한다"며 "만약 (수출 규제가) 시행된다면 한국 경제뿐 아니라 일본에도 공히 피해가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 부총리는 일본이 규제 조치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비롯한 상응한 조치를 반드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홍 부총리는 "해결이 안 되면 당연히 WTO 판단을 구해야 하기에 내부 검토 절차가 진행 중"이라며 "실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제소) 시기를 결정하겠다"고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WTO 제소 결과가 나오려면 장구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며 "국제법·국내법상 조치 등으로도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이 확대될 가능성에 대해선 "관련 기업과 소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응이 중요하다"며 "보복이 보복을 낳는다면 일본에도 불행한 피해가 될 것이기에 잘 마무리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일본의 조치가 나오기 전에 미리 막아야 했던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는 "올해 초부터 경제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었고 해당 내용을 꾸준히 점검해 왔다"며 "손 놓고 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홍남기 "日 규제 철회 안 할 시 상응하는 조치 반드시 마련할 것"
일본이 일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에 나선 가운데 청와대와 정부가 반도체 생산 대기업의 고위층과 잇따라 접촉하면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는 모습이다.
가장 먼저 반도체 기업과의 소통에 나선 것은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김 실장은 지난 2일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을 만나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관련 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그는 3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청협의회에서 "5대 그룹 등에 직접 연락해 소통·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정부와 기업들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도 이날 김 부회장을 만나 일본의 규제에 따른 피해 예상 규모와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 차장이 외교 정책을 담당하고 있지만 통상전문가이기도 한 만큼 관련 대책을 협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정부, 잇따라 삼성과 접촉…규제 맞서려면 기업 대응도 중요
김 차장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개정 협상을 이끌었고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등을 지낸 통상·협상전문가다.
당정청은 일본의 수출규제 대응 방안과 관련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수준의 집중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를 하고 있다고 전날 밝혔다.
청와대와 정부 등이 이렇듯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는 모습은 이미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오헬스, 미래차와 더불어 시스템반도체를 3대 신산업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30일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유지하면서 시스템반도체 분야도 집중 육성해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2030년까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를 하겠다는 삼성의 목표를 언급하며 "정부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로 미래의 성장을 떠받칠 3개의 기둥 중 하나가 흔들릴 위기에 처해 더욱 비상한 체제로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와 정치권의 공통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와 정부가 잇따라 삼성과 접촉하는 것 역시 일본의 수출 규제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정부의 대책뿐만 아니라 기업의 대응도 중요한 만큼 반도체 생산 현장의 최일선에 있는 기업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아사히신문 "수출규제 영향으로 日 업체 실적에도 영향"
일본 정부가 4일 발동한 반도체 제조 등에 필요한 핵심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가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에 미칠 여파가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내에서도 자국 기업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4일 아사히신문은 이번 수출 규제로 한국 반도체 업체와 거래하고 있는 일본 기업 및 세계 부품공급망에도 여파가 확산할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아사히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커지면서 일본 기업에 대한 여파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한 반도체 업체 관련자는 "수출 규제의 영향으로 한국 업체의 설비투자 의욕이 감소하면, 일본 업체의 실적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 부품공급망에 대한 우려도 일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업체의 반도체 및 유기 EL패널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스마트폰 및 TV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의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TV용 유기 EL패널과 관련해 한국 업체와 거래하고 있는 일본 전자업체 소니 측은 "이번 수출규제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니는 "TV를 생산하지 못할 가능성도 포함해 대응을 검토 중이다"라고 했다.
미국 애플의 '아이폰' 상위 기종 일부에도 삼성전자가 생상하는 유기 EL패널이 탑재되고 있다고 한다. 신문은 아이폰 생산이 정체된다면 애플에 부품을 공급하는 일본 기업에도 여파가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계에서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를 용인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본상공회의소 미무라 아키오(三村明夫) 회장은 지난 3일 기자단에게 "일본 정부가 (악화된) 한일관계를 해결하는 하나의 제안을 한 것"이라며 수출규제 강화를 지지한다는 자세를 나타냈다. 미무라 회장은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 명령 판결을 받은 일본 전범기업인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의 명예회장이다.
일본 경제동우회의 사쿠라다 켄고(桜田謙悟) 대표간사도 지난 2일 회견에서 "이번 조치는 정부의 일관된 메시지다”며 “한국 정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빨리 경제관계가 정상화되기를 기대한다"며 수출규제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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