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상에는 임금, 단하에는 갓 쓴 유생이 모인 과거장. 몽룡은 도포 자락 휘날리며 일필휘지 붓으로 답을 써내려간다. 과거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단일 왕조 500년 역사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조선 지배체계의 핵심이다. ‘난장판’이란 표현까지 만들어진 과거장에서 유생으로 분한 남자 무용수들은 도포 차림으로 붓을 들고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답안을 몸으로 각각 써 내려간다. 강력한 남성군무는 고전발레의 명작 스파르타쿠스에 비교되나 실상 다른 클래식 발레에선 보기 힘든 파격적 안무다.
어느덧 무대는 어사화를 쓴 과거 급제자들로 채워진다. 장원급제한 몽룡을 정점으로 어사화를 쓴 신임 관리들은 이전 유생 때와는 다른 일사불란한 군무로 경국제세(經國濟世)에 나서는 포부를 드러낸다. 몽룡은 장원급제의 상징 ‘마패’를 치켜든다.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창작 발레 ‘춘향’ 2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춘향’은 우리나라 무용 문화 발전의 한 축을 맡아 온 UBC가 우리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 2007년 초연한 ‘K발레’. 누구나 알고 있는 전통소설 춘향전을 2막 3장의 발레 드라마로 만들었다. 초연된 지 12년째인 ‘춘향’을 명작으로 키우기 위해 UBC가 들이는 공은 엄청나다. 흥행 면에서 창작 발레에 큰 투자를 하는 건 모험에 가까운데 UBC는 2014년, 2017년 대대적 개편을 이어왔다.

특히 2017년에는 ‘춘향’을 위해 작곡가 케빈 바버 피커드가 만든 창작곡을 버린다. 대신 UBC 예술감독 유병헌이 발레에 잘 어울리는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모든 음악을 석 달에 걸쳐 샅샅이 훑어 새 발레곡을 골라낸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유병헌은 “이몽룡의 캐릭터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다.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영웅 이몽룡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양반집 자제 이몽령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사랑의 서정적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곡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설명한다.
줄거리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1막에선 단오 축제에 만난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쌓으나 몽룡이 한양으로 떠난다. 2막에선 과거에 급제한 몽룡이 낙방거사로 위장한 암행어사가 돼 신임 수령 변학도 수청을 거부해 죽을 위기에 처한 춘향을 구해준다.
아기자기하나 심심한 1막에선 단연 몽룡과 심청의 파드되(2인무)가 독보적이다. 두 연인이 서로 겉옷을 벗겨주는 파격으로 시작되는 파드되는 ‘초야(첫날밤)’란 제목 그대로 농염하다. 사랑을 확인하는 두 연인의 애틋한 마음과 긴장, 설렘을 과하지 않게 춤으로 보여준다.

몽룡의 과거 합격으로 막을 여는 2막은 매 장면이 역동적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여러 무용수가 돌아가며 자신의 춤을 선보이는 고전발레의 재미 ‘디베르티스망(막간극)’은 신임 사또 변학도의 ‘기생점고’라는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구현된다. 형형색색의 치마저고리를 차려입은 기생들이 새 수령 눈에 들기 위해 갖가지 춤을 춘다.
기생점고는 이윽고 변학도와 춘향의 파드되로 이어진다. 한눈에 반한 변학도의 구애 춤은 춘향의 거부로 발레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거치나 격정이 돋보이는 파드되가 된다. 변학도는 이후 옥에서 끌어낸 춘향을 다시 겁박하는 과정에서도 인상적인 춤과 연기를 보여준다. 지난 5일 낮 공연에선 감정표현이 일품으로 평가받는 UBC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드미솔리스트 알렉산드르 세이트칼리예프가 좋은 호흡을 보여줬다.

창작발레 ‘춘향’의 미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옥중 해후 장면이다. ‘낙방거사’로 신분을 숨긴 몽룡은 누더기가 든 도포를 입고, 허리엔 술병을 찬 채 옥 앞에서 월매를 만난다. 낭인으로 전락한 몰골에 장모는 사위 가슴을 때리고 원망하며 딸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고전발레에선 보기 힘든 살아있는 연기에서 나온 공감의 힘이 객석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 공감은 감옥 창살을 마주 두고 만난 몽룡에게서 암울한 운명을 예감한 춘향이 달빛 스며든 옥 안에서 추는 슬픈 독무에서 배가된다.
이날 공연은 ‘러시아 발레 황태자’란 영예를 받는 블라디미르 시클랴로프(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가 ‘파란 눈의 몽룡’으로 등장한 첫 무대였다. 부채, 붓 등 낯선 소품은 물론 캐릭터, 배경 등 모두가 생소했을 터인데도 그는 세계 정상급 무용수답게 전혀 이질감 없이 배역을 소화했다. 1막 첫 무대인 단오축제에서도 파란 눈, 금발 댕기머리를 한 동네 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을 정도다. 탐관오리를 상징하는 변학도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알렉산드르 역시 러시아 출신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구호도 있지만 UBC의 ‘춘향’은 이미 세계인을 향해 열린 무대를 훌륭히 만들어 가고 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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