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사탄을 숭배하는 소아성애자 비밀 결사가 있다. 이들은 아이들을 납치해 성적으로 학대한 뒤 살해해 피를 뽑아 먹기까지 한다. 생명 연장을 위한 화학물질을 섭취하기 위해서이다. 정치·언론을 장악해 세계를 움직이는 검은 세력, 이른바 ‘딥 스테이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부터 ‘투자의 대가’ 조지 소로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배우 톰 행크스, 프란치스코 교황, 달라이 라마까지. 모두가 딥 스테이트의 일원이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다. 언젠가 트럼프가 주도하는 심판의 날이 찾아와 사악한 범죄 음모를 깨부수고 정의를 회복할 것이다.’
이런 내용을 기반으로 한 음모론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익명(anonymous)의 Q, 즉 큐어난(Qanon)을 신봉하는 이들이다.
큐어난은 2017년 10월28일 자칭 ‘애국자 Q’가 온라인 극우게시판에 극단주의적인 글을 올리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트럼프와 딥 스테이트의 싸움에 관한 기밀 접근권을 가진 고위 정보 관료라고 주장했다. Q는 미국 에너지부의 최고 기밀 취급 등급을 일컫는다. 그는 이 전쟁이 ‘폭풍’ 속에서 곧 끝이 나 미국의 위대함이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게임·종교집단과 유사… 팬데믹 기간 세 확산
큐어난은 사람들이 간단히 무시하는 주변부 현상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어느새 주류로 자리 잡았다. ‘집콕’ 생활로 인터넷 사용량이 늘면서 곳곳에 흩어진 큐어난 커뮤니티 활동이 왕성해진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페이스북에서 가장 규모가 큰 10개 큐어난 그룹의 회원 수가 코로나19 봉쇄 조치 이후 6배 이상 늘었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큐어난 그룹에는 각각 10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으며, 트위터는 최근 15만 개의 큐어난 관련 계정을 검색에서 잡히지 않도록 조치했다. NBC방송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자체 조사 결과 수천 개의 큐어난 그룹에서 수백만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했다. Q가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지 알려주는 ‘Q 드롭스’는 지난 4월 애플 앱스토어에서 유료 앱 부문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큐어난은 핵심 교리인 딥 스테이트 이론에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등과 관련한 기존 음모론까지 흡수하면서 광범위하게 뻗어 나갔다. 최근에는 톰 행크스가 사실은 코로나19에 걸린 것이 아니라 소아성애 혐의로 체포됐으며,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는 살아 있고,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 큐어난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했다.
이들이 보기에는 코로나19 위험성도 과장됐다. 큐어난 지지자들은 지구촌 엘리트들이 5G 네트워크를 이용해 코로나19를 유포한다고 믿거나, 민주당이 트럼프의 재선을 막으려고 퍼뜨린 바이러스라고 주장한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제약회사들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이 계획(plan)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플랜데믹’(Plandemic) 동영상의 확산 매개도 큐어난이었다.
실체가 없는 이런 주장에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큐어난과 게임 간 유사성을 지목한다. Q가 알 듯 말 듯한 메시지를 남기면, 지지자들은 이를 앞다퉈 해석하고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적용하며 재미를 느낀다. 게임 디자이너 에이드리언 혼은 “큐어난 신자들은 세계를 통제하는 클린턴 일당과의 비밀 전쟁이라는 매혹적인 판타지 세계의 문을 연 셈”이라며 “해석하기 힘들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지자들은 ‘세계를 구할 영웅’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을 각별히 주시하며 숨은 의미를 찾는다. 이들은 트럼프가 숫자 17을 말하면 열광한다. Q의 알파벳 순서인 17을 언급한 만큼 비밀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트럼프가 분홍색 넥타이를 매고 등장하면 납치된 아이들이 해방됐다는 신호다. 병원에서 영유아 유괴 의심사건이 발생했을 때 응급 코드명으로 ‘코드 핑크(pink)’를 쓰는 데서 비롯된 해석이다.
미 시사종합지 애틀랜틱은 큐어난을 가리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라고 했다. 신자(큐어난)들이 예배당(대화방)에 모여 선지자(Q)가 최근 남긴 말씀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종교와도 유사성이 짙다.
◆현실 범죄로 연결… 유럽으로도 확산
큐어난 지지자들은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현실 세계에서 범죄까지 저질러 우려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 뉴욕에서는 큐어난 추종자가 마피아 두목을 딥 스테이트 유력인사라며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일이 있었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협박한 혐의로 붙잡힌 지지자도 있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큐어난을 ‘잠재적인 국내 테러 위협’이라고 지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큐어난 지지 세력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세를 넓히고 있다. 8월 마지막 주말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등 유럽 각지에서 열린 ‘마스크 반대’, ‘봉쇄조치 반대’ 시위는 각종 음모론이 융합하는 현장이었다고 영국 BBC방송은 전했다. 집회 발언대에서는 코로나19 사망률과 관련한 가짜뉴스와 플랜데믹 이론이 쏟아져 나왔다.
한 영국인 남성은 어머니가 ‘반인륜적 범죄자인 빌 게이츠를 체포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면서 “음모론 때문에 가족 사이가 틀어졌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어머니가 유튜브 동영상에 사로잡혀 왓츠앱 채팅방에서 음모론 동영상과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며 “(가족 간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영국과 함께 독일에서도 큐어난 커뮤니티의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독일의 인종·문화적 정체성을 전복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들여오고 있다는 독일 극우진영의 음모론이 큐어난과 결합해 ‘트럼프가 독일을 메르켈 독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주장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큐어난 음모론을 독일어로 전파하는 텔레그램 계정의 팔로어 수가 12만4000명에 달할 정도다.
최근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업체들은 큐어난 관련 계정 수천개를 삭제하며 대응에 나섰으나, 불길이 잡힐지는 미지수다. 소셜미디어의 규제를 큐어난에 대한 딥 스테이트의 탄압으로 간주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공화당 묵인·방조 속 대선에도 영향 줄 듯
큐어난 지지자들은 제도 정치권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장에서 ‘우리가 Q’라는 문구나 큐어난의 구호인 ‘WWG1WGA’(우리 중 하나가 가면 우리 모두가 간다)가 적힌 셔츠를 입거나 손팻말을 든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는 11월 선출되는 연방 하원의원직에 도전하는 공화당 후보만 약 70명이며, 대표 주자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조지아) 등은 이미 경선을 이미 통과했다. 그린의 지역구는 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곳이어서 큐어난 세력의 원내 진출이 확실시된다. 5선의 현역 의원을 꺾고 후보 자리를 꿰찬 로런 보버트(콜로리다) 역시 “내가 Q에 대해 들은 모든 것이 사실이기를 바란다”며 “이는 미국이 점점 강해지고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이 보수적 가치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대선 때 ‘러시아 스캔들’이 문제였다면 올해에는 큐어난이 대선판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확실히 선을 긋지 않고 있다. 그는 “그 운동(큐어난)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안다.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그린 후보에 대해서는 “미래의 공화당 스타”라고 치켜세웠다.
공화당 내에서는 “미국 정치에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될 위험한 바보짓”(리즈 체니 하원의원) 등 큐어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거 티파티처럼 공화당을 장악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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