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까지 열린 도쿄국립박물관 ‘하니와’ 특별전의 절정은 ‘하니와 비늘 갑옷을 입은 무인’(무인 하니와) 5구였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박물관 소장 무인 하니와를 비롯해 군마현, 지바현, 나라현과 미국 시애틀미술관이 1구씩 소장하고 있는 걸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 나란히 세웠다. 같은 공방에서 같은 장인이 만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닮은 5구를 한눈에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어서 전시실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하니와는 고대 일본 특유의 대형 무덤인 ‘전방후원분’ 주변에 두었던 조형물로 무덤의 주인인 대왕, 왕 등 최고지배자의 권위를 보여준다. 일본열도에 정치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 ‘고훈시대’(古墳時代·3세기 후반에서 7세기까지 약 350년간)를 상징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사람, 집, 동물, 무기, 배 등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성역화된 고분 주변을 지키며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기를 바란 당대인의 바람이 깃든 것으로 해석된다.
도쿄박물관 소장 무인 하니와는 하니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974년 하니와 중에서 처음으로 국보로 지정됐고, 우표 도안으로 활용돼 대중적 인지도도 꽤 높다. 투구, 갑옷, 큰칼, 활 등을 제대로 장착하고 군인으로서의 근엄함을 보이고 있지만 얼굴에는 소년미가 가득해 사랑스럽다. 함께 전시된 닮은꼴 무인 하니와들의 인상도 그렇다.
20세기 일본은 1000년 전의 유물을 당대의 필요에 따라 재활용했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이 22일까지 개최하는 ‘하니와와 토우의 근대’ 전시회는 근대 일본의 다양한 하니와 활용방식을 설명한다. 후키야 고지(?谷虹兒)의 ‘천병신조’(天兵神助)는 제국주의 일본의 일그러진 욕망이 투영된 작품이라 눈길을 끈다. 천병신조는 ‘천우신조’(天佑神助·하늘과 신이 돕는다)에서 ‘우’를 ‘병’으로 바꿔 단 제목이다. ‘하늘의 병사를 신이 돕는다’ 정도로 해석될 듯싶다. 쓰러진 일본군을 품에 안은 무인 하니와는 칼을 들어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이다.
작품이 제작된 것은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던 1943년이다. 전쟁을 미화, 독려하던 당대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무인 하니와가 병사를 품에 안은 모습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와 꼭닮아 전장에서의 죽음을 신성화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하니와를 이런 맥락으로 활용한 사례는 천병신조말고도 많았다. 한 고고학자는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한 하니와를 두고 “마치 눈물을 참고 있는 표정이다. 자식이 전사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하니와의 얼굴은 ‘일본인의 이상’”이라고 했다.
하니와는 ‘일본서기’, ‘고사기’ 등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신화를 이미지화하는 재료로서 일본인의 마음, 이상의 원류로 간주된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 일본은 1000년 전의 역사를 빌려 스스로의 정체성을 전쟁, 죽음으로 삼았던 셈이다. 원형 무인 하니와가 가진 사랑스러움은 온데간데없는 이런 활용의 배경이 된 당대 일본의 광기를 마주한 듯해 섬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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