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공간까지 찾아와 공격
생계 위협하는 방식으로 진화
'돈벌이' 악용하는 이들도 문제
소송전 아닌 시민 대화의 장 필요" 전문가>
최근 세종대 온라인 강의에 외부인이 접속해 음란 사진을 공유하고 일베 용어와 욕설을 대화창에 올리는 사건이 일어나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단순한 사이버 범죄 같지만, 이 강의를 진행하던 여자 교수를 겨냥한 정황이 있었다. 해당 교수는 2019년 발표한 논문에서 유명 유튜버 ‘보겸’이 유행시킨 용어 ‘보이루’가 여성혐오 표현으로 사용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보겸 측이 이에 반발하면서 해당 교수는 보겸 지지자 등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됐다. 온라인 강의 침입자를 경찰에 고소한 윤지선 교수는 “지난 두 달간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진 공격과 마녀사냥과 음해를 좌시하지 않고 엄정히 대처하겠다”고 지난 25일 밝혔다.
이번 사건은 여성주의가 대중화되며 여성주의자에 대한 반발, 공격 양상도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와 관련해 실태를 들여다보고, 대안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주의적 활동을 해 온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 김진아 여성의당 서울시장 후보,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 A씨를 27일 서울시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편의상 각각 서, 김, A로 표기했다.)
-윤지선 교수의 논문을 둘러싼 갈등이 ‘실체 있는 폭력’으로 번지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보시나.
서 : 보겸과 윤지선 교수 개인 사이의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단순한 개인간 문제를 떠난듯 보인다. 유튜버 보겸의 지지자들이 대학에 찾아가 수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소음을 내며 항의하기도 하고 수업 링크 유출로 수업에 외부인이 들어와 학생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등 개인을 넘어 주변에까지 가해지는 공격 양상을 보이고 있다.
김 : 그렇다. 논문 갈등에서 비롯된 윤지선 교수를 향한 공격은 도를 넘은 측면이 있다. 학회를 협박하거나 해고하라고 직장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직접 직장에 찾아가거나 온라인 강의에 침입하는 식의 공격은 개인의 생존권과 노동권에 대한 높은 수준의 침해다.
서 :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소수자나 약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나아가 실질적인 위협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그런 표현방식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돼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열위에 처한 집단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게 표현의 자유로 인정될 수 있는가 고민해봐야 한다. 서구 사회는 우리나라보다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하지만 최근 들어 약자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규제하는 흐름이 강하다. 그건 과거의 차별적 역사에 대한 반성이자 차별받아온 약자 집단에 대한 현재 세대의 책임감의 표현이다.
-실제 학교에서 ‘보이루’와 같은 말들은 얼마나 흔하게 사용됐나.
A : 지금은 아니지만 ‘보이루’와 ‘앙 기모찌’는 한때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상적이라고 할만큼 매우 흔하게 쓰였다. 아이들이 ‘보이루’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본다면 여성혐오 용어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을 거다.
-여성혐오적 용어로서 광범위하게 쓰였다는 의미인가.
A : 아이들이 많이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가 여자라는 게 드러나면 대화창에 ‘보이루’라는 말이 주르륵 달렸다. 그게 정말 그 유저가 보겸 팬일 것 같아서 쓴 말이겠나. 수학여행 장소에서 타학교 남학생들이 여자 교사와 여학생들에게 아무런 맥락 없이 “보이루”라고 말하고 낄낄거리는 일을 겪었다는 교사도 있다. 보겸이라는 유튜버의 의도가 여성 혐오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너무 광범위하게 변질돼 쓰이고 사회 문제로도 언급되는 상황이라면 그가 선을 그었어야 했다. ‘이런 의도로 쓴 게 아니니 제발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든가. 하지만 그런 설명이나 해명 등이 없던 상황이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표현이 아니라며 사태를 키운 것이 참 의아하다.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목소리를 낸 이들에 대한 집단적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성주의자로서 공격 받은 경험이 있나.
A : 예전에는 온라인 댓글 등을 통한 비난이나 공격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일터인 학교로 전화가 온다. 소속된 공동체에 폐가 되게 만든다. 최근 ‘나다움 어린이 책’ 논란 때도 해당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 전화가 쏟아졌다. 댓글과 달리 오프라인의 삶과 생계를 위협하는 전화는 무시하기 힘들다. 예전에 비해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많이들 학습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 : 작년 4월, 집단적인 사이버 불링의 타깃이 됐다. 시기적으로 오묘했다. 여성주의를 내세운 ‘여성의당’이 창당되고 처음 치른 4·15 총선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낸 시기다. 전국에서 22만표를 얻었고, 젊은 여성들의 큰 지지를 받은 것이 드러났다. 여성주의를 견제하는 이들에게 이 점이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당을 폄하하기 위해 당의 공동대표인 저를 깎아내리는 공격이 이어졌다. 트위터에서 시작된 공격은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와 네이버 블로그까지 수십 군데로 확산했다. 한 달 가까이 공격을 받았다.
-당시 온라인에서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김 : 제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공간까지 공격 대상이 됐다. 유튜버들이 영업장에 찾아와 상황을 중계하고 사진을 찍으며 소위 ‘밥줄’을 위협한 거다. 2018년쯤 게임업계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일러스터·성우 등이 있었는데, 여성주의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이 더 일상화된 느낌이다.
-집단을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했다는 뜻인가.
김 : 그렇다. 상징적인 인물 한 명을 제압하면 나머지는 더 손쉽게 억압할 수 있지 않나. 전체를 일시에 위축시키고 침묵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법조인으로서는 이런 집단공격을 어떻게 보나.
서 : 메시지 자체보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 등 ‘메신저’에 대한 공격이 너무 심하다. 명예훼손 등 법적 다툼으로 가도 결국 본질과 관계없는 사소한 것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개인에게 자행된 상스러운 욕설이 모욕이냐 아니냐 등을 따지는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사법기관의 판단 결과 역시 사안의 쟁점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결론을 내려주는 역할을 못한다. 개인을 향한 공격의 수준이 점점 저열해짐에 따라 소송전 등 아무런 사회적 의미가 없는 것들에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고 있다.
-1인 미디어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이슈몰이’로 오히려 돈을 벌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김 : 1인 미디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모두가 알지 않나. 또 그 영향력이 수익 창출로 이어진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이런 구조에선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콘텐츠가 필요한 거다. 지금 소위 ‘보겸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 중 상당수는 조두순이 출소했을 때는 그 동네에 가서 마치 정의를 구현하는 양 조회수를 올렸을 거다. 더 관심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아이템에 몰린다는 뜻이다.
-약자 혐오에서 비롯된 갈등에 맞서 어떤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보시나.
서 : 혐오로 인해 일어난 갈등이 결국은 고소전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과연 맞는 해결책인가 의구심이 든다. 법정으로 가면 누가 더 잘못했다, 명예훼손이다, 아니다 그런 식의 결론은 나겠지만 과연 그게 궁극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건의 결론은 날지 몰라도 근본적인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고소전이라는 게 개인도 비용을 들이게 되지만 국가차원에서도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등이 나서야 하니 사회적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이렇게 소모적인 싸움 끝에도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김 : 그렇다. 사실 기성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소수자 혐오 문제에 관심없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정쟁과 권력의 쟁취, 재선 등과 크게 관계 없는 과제가 이런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 : 혐오와 그로 인한 갈등을 우리 사회가 터놓고 함께 논의하고 고민해야하는데 우리 사회 구성원에게 이걸 왜 고민해야 되는지 그 유인력이 없는 상황인 것 같다. 진지한 고민이나 의견 교환 없이 그냥 떼로 몰려가서 싸우고 욕하고 고소하는 게 과연 맞는 사회일까. 토론의 장을 열어놓고 다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정지혜·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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