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을유문화사·정음사 첫 소개
방문판매 위축 등 1980년대 사양길로
민음사, 400권째 전집 첫 출간 인기
열린책들·문학동네 가세해 3강 구도
차별화된 테마 이슈형 출간 늘어나
젠더 이슈 반영한 작품 과감히 수용
월간·시즌제 발간에 독자 관심 높여
‘새작품·새언어 감각 발굴’은 숙제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10쪽)
시는 온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라는, ‘온몸의 시학’을 주장한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를 표제로 한 김수영 시론집이 지난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400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1998년 첫 책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펴낸 지 24년 만으로, 국내에서 400권을 넘긴 것은 처음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은 대체로 고전이거나 앞으로 고전이 될 작품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한국 문학이나 출판시장은 물론 교양의 토대라는 점에서 일대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2000년대 문학동네와 열린책들이 가세하면서 붐이 조성되는 듯하던 세계문학전집 시장은 한동안 침체를 겪은 뒤 최근 다시 일부 출판사가 새로운 테마형 전집 출간에 나서면서 다시 꿈틀댈 조짐이다. 국내 세계문학전집 시장은 언제 형성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과제나 나아갈 지향은 무엇인가.

을유문화사, 초기 주도… 중역 및 한자 많아
괴테의 ‘파우스트’나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브론테의 ‘제인 에어’, 오웰의 ‘1984’, 헤세의 ‘데미안’….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거실 책장에는 마치 인테리어처럼 이 같은 세계문학전집이 꽂혀 있는 게 유행이었다.
국내에 세계문학전집을 처음 소개한 것은 1959년 을유문화사와 정음사였다. 특히 을유문화사는 최초로 100권짜리 ‘을유세계문학전집’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1975년 종료된 을유판은 국내 전집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일본 출판사들의 전집을 많이 참조한 데다 중역이 많고 한자 표현도 많았다는 분석이다. 토대가 미흡했고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번역자풀 역시 풍부하지 않은 탓이었다.
1960년대에는 신구문화사, 1970년대엔 동서문화사와 삼성출판사가 뒤를 이었지만, 1980년대 방문판매의 위축과 한글세대 등장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지평 연 민음사… 400권째 출간
민음사는 1998년 ‘새로운 기획, 새로운 번역, 새로운 편집’을 모토로 새 전집 출간에 나서면서 새 지평을 열었다. 박맹호 당시 민음사 회장은 “미래 세대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세계문학을 읽어야 한다”며 원전에 충실한 한국말 번역을 주문했다. 당시 민음사에서 이를 지켜본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전화 통화에서 “민음사는 기존 영미권 중심의 전집과 달리 제3세계 작가와 작품을 최대한 발굴하려고 했고, 젊은 연구자와 번역자들을 대거 발굴해 일본어 중역 대신 직접 번역과 현대 한글에 가깝게 번역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민음사는 현재까지 셰익스피어나 단테 등의 고전문학은 물론 헤밍웨이, 마르케스 등 현대문학의 거장 등 35개국 175명의 작가 작품을 소개했다. 번역자도 모두 165명이 참여했다. 세계 명화와 그 아래 단색이 단순하게 디자인된 표지는 민음사판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민음사 전집은 현재까지 1만1000쇄를 거듭하며 2000만부 이상 발행됐다. 민음사는 전체 매출의 30% 이상이 세계문학전집에서 나올 정도로 대표 전집 시리즈가 됐다.
문학동네 및 열린책들 가세해 3강 구도로
민음사의 성공에 따라 2000년대 들어서 많은 출판사가 전집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2001년 문학과지성사가 ‘대산 세계문학총서’를, 2008년 펭귄클래식코리아가 ‘펭귄클래식’을, 을유출판사도 전집 출간을 재개해서 2020년 100권을 돌파했다.
특히 2009년 열린책들과 문학동네가 가세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러시아 문학 전문 출판사를 표방한 열린책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필두로 전집 출간에 나서서 2012년 200권을 돌파했다.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많고 셜록 홈스의 ‘바스커빌가의 개’를 비롯해 추리물이나 SF 등 장르 작품을 상당수 포함했다.
한국문학의 강자 문학동네도 같은 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시작으로 전집 시장에 뛰어들었다. 특히 국내에 번역되지 않는 초역작이나 이미 절판된 책을 다수 선봰 끝에 2021년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를 펴내며 200권을 돌파했다.
국내 세계문학전집 시장은 민음사가 선두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문학동네와 열린책들이 추격하는 3강 구도를 형성했다. 장 대표는 “1950~1980년까지 출간된 고전은 민음사판이 많이 확보한 반면 문학동네는 199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유 중이다. 열린책들의 경우 좀더 개방적이어서 SF나 마이너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비교 분석했다.

“여성과 장르소설 포섭” 테마형 전집 잇따라
대입 논술 비중이 줄어들고 독서 시간도 줄어들면서 세계문학전집 붐도 다소 잦아든 가운데 최근 차별화를 바탕으로 테마 이슈형 전집 출간도 잇따라 이뤄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난 1월 울프의 ‘등대로’를 시작으로 전집 시리즈를 매달 한 권씩 출간하고 있다. 휴머니스트 출판사 역시 4개월마다 하나의 테마로 다섯 권씩 묶어서 해마다 15권씩 세계문학시리즈를 출간할 계획이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경우 지난 1월부터 베트남 소설 ‘영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총서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새 시리즈들은 고전이나 본격문학 중심에서 벗어나 젠더 이슈를 반영한 여성 작가의 작품이나 장르작품도 과감히 수용하는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아울러 월간 또는 시즌제로 발간해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도 특징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특정 주제나 이슈별 선집은 새롭게 주목받을 수 있는 시도로,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특히 독자들의 입장에선 선택지가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반가운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다양한 작품 발굴과 투자 동반돼야
독자의 반응도 좋다. 교보문고 등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문학 분야의 도서판매량은 전년 대비 13.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정선씨의 경우 2020년 이래 1년 넘게 100권 이상의 전집을 읽은 뒤 에세이를 펴내 화제를 모으는 등 시민들의 애정도 만만치 않다.
백 대표는 “국내 시리즈는 전집을 내걸고 있지만 낱권 판매가 20년 이상 보편화돼 단행본 개념으로 판매가 돼 왔다”며 “코로나 시기 독서 시간이 증가하면서 붐 정도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전집을 더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교양과 상식의 자양분인 세계문학전집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위해선 개선해야 점 역시 적지 않다. 전집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작품과 작가를 발굴해야 하고, 지속적이고 꾸준한 투자와 번역자 발굴 역시 이뤄져야 한다는 분석이다.
장 대표는 새 흐름을 긍정 평가하면서도 저작권 있는 새 작품을 얼마나 많이 발굴하고 새 언어 감각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발굴해낼 수 있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관측했다. 즉 “이미 출판된 그럴듯한 책들이 아니라 여성이나 SF나 장르소설 등 저작권이 있는 새 작품들을 발굴해 보여줄 것인가와 젊은 언어감각을 얼마나 새롭게 발굴해 낼 수 있는가”라면서 “아울러 초기 10억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할 텐데, 얼마나 꾸준한 투자가 가능할 것인가도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백 대표 역시 “문학의 자양과 저변을 만드는 토대이기에 꾸준하게 양 자체를 늘려갈 필요가 있다”며 “아울러 독자들이 편하게 읽기 위해, 미국이나 일본처럼, 인기 있는 책을 중심으로 문고본 판형으로 개발해도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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