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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1861∼1922)는 일찍이 동학에 입문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이 돼 전라도의 남접 지도자 전봉준과 함께 동학군을 이끌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3대 교주가 됐고,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삼전론(三戰論)’이라는 수양교재도 만들었다. ‘삼전’은 도전(道戰)·재전(財戰)·언전(言戰)을 이르는데 도덕과 문명의 우열, 상업과 공업의 우열, 외교적 담판의 우열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내용이다. 1906년 귀국해 국한문 혼용체 신문 ‘만세보’를 발행하고 인쇄소 보성사를 세운 데 이어 보성학교·동덕여학교 등 수십 개의 학교를 인수하거나 신설했다.

한일합병 한 달 전인 1910년 7월에는 천도교도들에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 이제 몇 해를 지나지 않아서 그 능력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만고에 없는 일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 예언대로 1919년에 민족 최대 항일독립운동인 3·1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15명이 천도교도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독립국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독립선언 방식을 채택했다. 보성사에서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2만1000매 인쇄해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3·1 운동 직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 등에서는 의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의암은 평생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함)·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제함) 등 천도교 기치를 실행에 옮겼다. 언론인 김삼웅은 저서 ‘의암 손병희 평전’에서 “백성이 학정에 시달릴 때 보국안민의 동학혁명으로 봉기하고, 민족이 외적의 압제에 짓밟히자 광제창생의 3·1 혁명을 주도한 것은 교헌(敎憲)의 정신에 충실한 종교운동이자 곧 민족해방운동이었다”고 했다.

그는 독립선언식 후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구금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됐으나 1922년 5월19일 요양 중 병으로 숨졌다. 오늘이 의암 순국 100주기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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