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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경의행복줍기] 출근길 지하철 안 무언의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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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28 23:18:50 수정 : 2022-06-28 23: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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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볼일이 있어 오전 7시30분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출근 시간이라 복잡할 텐데 걱정했는데 상황은 그 이상으로 치열했다. 사람들 틈에 끼여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마스크 쓴 얼굴들이 너무 가까이 있어 숨이 턱턱 막혔다. 내려서 택시라도 탈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정확한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기에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견디는 수밖에.

그런데 가만 보니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의해 가장 알맞은 음을 내는 악기 연주자들처럼 조화롭게. 정차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마다 백팩을 멘 청년은 앞으로 백팩을 돌려 품에 안고, 가로로 서 있는 사람은 어깨를 움직여 세로로 서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두 다리를 붙였다 벌렸다 하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발이 편하게 자리 잡는 걸 도왔다. 의도된 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워 습관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도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 안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움직여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갑자기 콧등이 ‘찡’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젊은 직장인들이 오늘의 치열함을 견디고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게. 서로에 대한 말 없는 배려와 위로였다. 대부분 직장인이기 때문에 직장인 형편을 누구보다 알고 이해했다.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보내면 지각이라는 불성실의 프레임에 갇혀 상사 눈치를 봐야 하는 곤욕스러움까지 이해한 것이다. 대단하다. 멋지다. 힘껏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문득 오랫동안 함께 일한 라디오 드라마국 김 피디가 떠올랐다. 그의 꿈은 희곡작가였다. 바쁜 와중에도 1년에 한두 편씩 자신의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늘 부족해했다. 김 피디는 월세 나오는 3층짜리 건물을 너무도 갖고 싶어 했다. 거기에서 나오는 월세로 부양 의무를 충당하고 자신은 마음껏 희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많은 직장인의 로망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김 피디가 이런 말을 했다. 건물이 없어서 자신이 1년에 한두 편이라도 희곡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 안타까운 갈증과 열망이 오히려 좋은 희곡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고. 드디어 김 피디가 월세 나오는 3층짜리 건물을 가슴에서 빼냈다. 다행이었다.

불가능한 현실인데 그걸 바라보며 진을 빼는 일은 인생을 소모하는 일이다. 오히려 부족함 없는 풍요로움은 의욕을 빼앗고 모든 걸 심드렁하게 만들 수 있다. 오전 7시30분 9호선 급행열차 안이 치열하지만 아름다운 건 그들이 꿈을 향해 달리기 때문이다. 사는 게 심심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는 사람한테 꼭 오전 7시30분 9호선 급행열차를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지하철 안 누구보다 뜨겁게 사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모닝커피 한잔을 대접하고 싶은 오늘이다.


조연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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