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의회가 친환경 투자 기준인 그린 택소노미(녹색 분류체계)에 원전과 가스를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다면 원전과 화석연료인 가스도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 기술’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 정부가 작업 중인 K-택소노미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원전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호등에 녹색불이 들어왔다고 해서 실제로 투자자 물꼬를 틀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EU의회가 6일(현지시간) 본회의를 열고 원전과 가스를 택소노미에 포함시키는 EU집행위원회(행정부 격)의 제안을 두고 표결을 진행한 결과 328명이 포함 쪽에 손을 들었다. 포함하면 안 된다는 쪽은 278명에 그쳤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원전 안전과 가스 의존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면서 원전과 가스를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보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EU집행위의 초안을 뒤집지는 못했다.
택소노미는 탄소중립에 맞는 경제 활동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기준과 조건을 담고 있어 투자자들이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참고서처럼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여겨진다. 2018년부터 논의가 시작됐으나 정부와 산업계의 줄기찬 로비 속에 수차례 다시쓰기를 거듭한 끝에 일정을 훌쩍 넘긴 지난 2월 EU집행위는 원전 등을 녹색기술에 포함시킨 초안을 내놨다. 단,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신규 원전은 2045년 이전에 건설 허가를 받아야 하고, 2050년까지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장 운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 기존 원전은 2025년부터 더 안전한 ‘사고 저항성 핵연료’를 사용해야 한다.
원전을 택소노미에 넣기 위해 가장 바쁘게 뛴 나라는 프랑스다. 원전 부문에서 유럽의 맹주인데다 자국 내 산업과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 사활을 걸고 뛰었다. 이를 두고 한 유럽의회 의원은 “택소노미는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를 위한 정치적 게임이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EU의회의 결정으로 원전을 확충하려던 프랑스와 폴란드 등 유럽국가는 물론 탈(脫)탈원전을 추진하는 한국도 한숨 돌리게 됐다. 익명을 요청한 환경법률 전문가는 “유럽 기구 가운데 가장 진보적으로 꼽히는 의회에서 원전과 가스를 녹색기술로 인정했다는 것은 시장에 ‘좌초자산 위험이 낮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전했다. 정용훈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도 “택소노미는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국내외 원전 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택소노미의 의미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택소노미란 투자 가능 여부를 가리는 강제조항이 아니라 지침일 뿐, 결국 투자자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익률인데 안전기준이 계속 올라가면서 더는 원전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EDF(한국전력에 해당)가 프랑스와 핀란드, 영국에 짓고있는 신규 원전은 공사가 지연돼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태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택소노미는 사실 국영 유틸리티(전력회사)가 세금으로 발전소를 지을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 체코나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게 택소노미”라며 “민간 기업이 과연 택소노미만 보고 투자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라고 전했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도 “택소노미 의사결정 과정이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은 시장이 더 잘 안다. 택소노미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법적 다툼으로 번질 공산도 있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는 원전이 택소노미에 포함될 경우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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