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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터울 두 건물… 금융의 시대적 아이덴티티를 담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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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9-12 01:00:00 수정 : 2023-09-11 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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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하나銀 본점·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

견고한 붉은 화강석 건물
금본위제 폐지 이전 시대엔
화폐 고유한 가치 보호 강조
금고처럼 단단한 외형 추구

유연한 곡선형 유리 건물
화폐에 ‘이자’ 가치 더해 융통
‘금융’ 행위가 중요해진 시대
건물 디자인도 ‘흐름’ 상징화

서울 중구 을지로1가에 가면 ‘숨은그림찾기’를 하게 되는 건물이 있다. 바로 을지로입구역 교차로 북서쪽에 있는 하나은행 본점이다. 여기서 내가 찾는 숨은그림은 숫자 ‘1’이다.

어떤 기업이든 자신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지을 때는 그 건물을 통해 해당 기업의 상징이나 기업이 추구하는 바, 즉 비전(Vision)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건축물은 가장 비싼 선전매체다. 이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건물의 형태다. 물론 형태만으로 건축물을 설명하는 상황이 설계자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겠지만 그만큼 강력한 수단도 없다.

숫자 ‘1’은 건물로 구현할 수 있는 비교적 쉬운 형태다. 일단 위아래로 긴 모양이니 많은 기업이 사옥으로 사용하는 타워에 적용하기 수월하다. 여기에 타워 상층부의 형태를 조금만 조작하면 숫자 ‘1’과 더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 더군다나 ‘1’은 ‘최고’, ‘최선’, ‘선두’, ‘리더’ 등 모든 면에서 1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업의 비전에 자주 쓰이는 숫자다. “우리 기업은 2등을 추구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기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업의 사옥 중 숫자 ‘1’을 닮은 형태로 설계된 건물이 꽤 있다.

하나은행 본점에서는 교차로에 가까운 모서리의 둥근 부분이 위로 곧게 뻗다가 상층부에서 노출범위가 넓어지면서 숫자 ‘1’이 완성된다. 여기에 ‘1’을 ‘일’이 아닌 ‘하나’로 읽으면 건물을 사옥으로 사용하는 기업의 이름이 된다. 그래서였을까? 유동인구가 많은 교차로를 향해 기업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숫자를 내밀고 있는 설계안을 건축주는 꽤 만족했다고 한다. 물론 교차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고 숫자 ‘1’을 찾아내고 이를 ‘하나’라고 읽을지는 알 수 없다.

 

설계를 맡은 삼우설계는 ‘1’을 연상시키는 건물의 형태가 아닌 다른 논리로 디자인 개념을 설명한다. 설계사는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은 교차로와 조선시대부터 도심이었던 대지의 여건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교차로와 가까운 건물의 입면과 도심을 향한 입면을 각각 다르게 설계했다.

구체적으로 많은 사람이 오가는 을지로입구역 교차로에 면한 입면은 ‘역동적인 흐름’이 빚어내는 곡선으로 설계했다. 설계사는 가급적 매끈한 곡면을 구현하기 위해 유리 패널을 고정하는 장치를 안으로 숨기고 3중 곡유리를 사용했다. 국내 최초로 3중 곡유리가 쓰인 이유는 곡면이 햇볕이 강한 남쪽과 동쪽을 향해 있어서 단열성능을 높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도심을 바라보는 반대편 입면은 서울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맥락을 반영하여 수평 방향의 줄눈을 강조했다. 그리고 수평과 대조되는 수직방향의 창살(louver)을 더해 ‘고객과 은행의 신뢰’를 표현하고자 했다.

금고나 방패처럼 단단해 보이는 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왼쪽)과 금융의 모든 영역을 유연하고 심리스하게 연결하는 흐름이 느껴지는 하나은행 본점. 30년의 터울을 두고 같은 설계사가 디자인한 두 사옥은 돈에 대한 변화된 관점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실 을지로입구역 교차로에서 하나은행 본점을 보고 있으면 건축주가 원했던 숫자 ‘1’보다는 그 옆에 있는 강렬한 색깔의 더존을지타워와 짝을 이루며 떠오르는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더존을지타워는 하나은행 본점보다 30년 앞선 1987년에 준공됐다. 당시에는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이었는데, 2017년 부영그룹에 매각돼 ‘부영을지빌딩’이 되었다가 2년 만에 더존비즈온에 매각돼 지금은 ‘더존을지타워’로 불린다.

 

하나은행 본점과 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은 30년의 터울을 두고 삼우설계가 설계했다. 그리고 두 건물 모두 당대 최신의 기술과 공법이 최초로 적용된 ‘인텔리전트 빌딩(Intelligent building)’이다. 하지만 한 건물은 유리로 된 매끈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다른 건물은 붉은색 화강석이 견고한 인상을 준다.

두 건물의 서로 다른 디자인을 각 시대에 유행했던 타워 디자인의 트렌드(Trend)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에 쓰인 인도산 붉은색 화강석은 1980년대 삼성그룹이 지은 건물에 반복적으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옛 삼성생명 본사(현 부영태평빌딩)와 옛 중앙일보 사옥(現 삼성생명 서소문빌딩)을 들 수 있다. 어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삼성그룹의 창업주가 좋아했던 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건물을 하나의 프레임에 넣고 보면 1971년 미국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떠오른다. 이 사건을 통해 돈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닉슨 미국 대통령은 금과 달러 간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금본위제 완전 폐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동시에 채무화폐 제도를 채택했다. 이 조치를 통해 미국은 달러를 무제한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느슨하기는 했지만 달러가 금과 연동돼 있을 때 비록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더라도 달러는 금 일정량에 대한 영수증이었다. 하지만 금과 분리된 후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는 건 달러를 발행한 미국의 신용밖에 남지 않게 됐다. 신용은 무형이다. 그 무형의 연약함을 우리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실감했다. 무형을 기반으로 한 돈은 이론상 무한히 찍어낼 수 있고 가치의 증식도 가능하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메커니즘(mechanism)을 거쳐야 한다.

돈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돈을 다루는 은행, 보험, 증권회사가 사용하는 건물의 디자인도 변하기 시작했다. 금의 가치를 대체하고 교환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했을 때 돈을 다루는 회사는 화폐가 지닌 고유한 가치를 보호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당연히 회사가 사용하는 건물도 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처럼 금고나 방패같이 단단해 보이도록 설계됐다.

반면 신용을 기반으로 발행된 화폐에 이자라는 가치를 더해 융통하는 ‘금융’이라는 행위가 더 중요해지면서 돈을 다루는 회사는 돈의 가치를 무한히 늘릴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강조해야 했다. 건물의 디자인도 하나은행 본점과 같이 돈을 대차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유연하고 심리스(Seamless·솔기 없이 매끄러운)하게 연결하는 흐름이 느껴지도록 설계됐다.

그럼 블록체인, NFT(대체불가능토큰), 그리고 가상화폐와 같은 미증유의 변화가 일어나는 지금부터 30년 후 금융회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의 디자인은 어떻게 바뀔까? 지금까지의 변화를 보면 돈의 무형적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데 반해 유형적 가치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 돈이 디지털 세상의 숫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됐고, 현금이 없는(cashless) 것을 넘어 지갑 없는(walletless) 삶을 산 지도 꽤 됐다. 그렇다면 유형의 자산 중 하나인 사옥도 사라질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하나은행 본점과 옛 삼성화재 을지로 사옥 사이에 건물 없는(buildingless) 금융회사 사옥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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