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집, 오리, 강남의 담수어 요리나 경식⋯. 식사 시간은 보통 15분을 넘지 않았지만, 만주족과 한족, 북방과 강남의 요리를 일상적으로 먹었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는 미식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침과 점심 두 차례 식사 외에도 차와 경식을 먹었다. 순행 때에는 여러 요리사를 대동해 다양한 음식을 섭취했다. 반면 샥스핀, 해삼, 새우, 전복 같은 해산물은 거의 먹지 않았다. 조선에서 고급 해삼을 헌상해도 그저 감상만 했다고 한다.
중국은 청조 건륭제 이후 만주족과 강남의 식문화가 융합된 요리를 왕성하게 소비했다. 민간의 경우, 만주족의 요리와 한족의 요리에서 가려 뽑은 최고급 연회 요리로 알려진 ‘만한전석’이 청 말년부터 유행했다.
고대부터 중국요리는 남과 북의 두 계통이 존재했고, 당송 시대에는 각 지방에서 서로 다른 요리가 경쟁적으로 발전하다가 명말 청초에 4대 요리로 정착됐다. 만주(북방), 강남, 쓰촨, 광둥(및 푸젠) 요리 중심의 중국 4대 요리라는 인식은 명말 청초 무렵에 정착됐다.
1842년, 중국은 영국과 아편전쟁을 벌인 뒤 체결한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근대 국민국가 형성이 가시화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상하이에 차례로 조계를 개설하면서 이곳 조계를 중심으로 중국 각 지방의 요리점이 속속 등장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요리들은 19세기 이후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각국으로 확산했고, 특히 1930년대 중일전쟁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을 전후해 타이완, 홍콩, 동남아, 한국, 일본, 미국 등 세계로 급격히 확산했다. 상하이 요리는 1990년대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중국 전역으로 확산하기도 했다.
중국요리가 근대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은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국의 요리 확산 과정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분석이다. 즉, 중국 요리는 중화 제국이 쇠퇴하고 위기를 맞던 19~20세기에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정부나 기업이 중심이 아닌 개개인 중국인 ‘화인’들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프랑스 요리의 경우 18~19세기 프랑스 정부의 주도로 주요한 외교의 장에서 의식적으로 퍼져나갔다. 중국 요리의 경우 중국 정부보다는 오히려 중국 요리를 수용하는 현지국가나 기업 등이 깊이 개입돼 확산한 측면까지 있었다.
중국 요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을까. 각지로 퍼져나간 중국 요리는 세계 각국의 식문화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문학부 교수인 저자 이와마 가즈히로는 책 『중국요리의 세계사』(최연희 정이찬 옮김, 따비)에서 오늘날 중국요리가 형성되고 퍼져나간 과정과 중국요리가 각국의 국민요리가 된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각 국가와 사람들이 중국 요리에 담고자 했던 생각과 역사를 읽어내려고 시도한다.
책에 따르면, 중국요리는 외국 요리의 범주를 넘어서 세계 각국이나 지역에서 국민 음식이 된 경우가 많았다. 베트남의 퍼, 싱가포르의 뇨냐 요리, 태국의 팟타이, 한국의 짜장과 짬뽕, 일본의 라멘, 미국의 촙수이와 포춘쿠키, 호주의 커리락사⋯. 중국요리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에서 현지 사정에 따라서 몇 가지 단계 또는 유형으로 현지화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첫째는 광둥 요리, 산둥 요리 등으로 불리며 세계 각국에서 현지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가능한 고향의 맛을 지키려 한 요리 형태였고, 둘째는 싱가포르의 뇨냐 요리나 미국의 촙수이 등 현지화된 중국요리 형태였으며, 셋째는 베트남의 퍼, 일본의 라멘, 한국의 짜장면, 태국의 팟타이, 인도네시아의 나시고렝 등 현지 요리로 국민음식인 됐다.
한국에서도 1880년대부터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께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에 의해 한양을 중심으로 중국요리점이 생겨났다. 화인 유입이 늘어나면서 ‘아서원’, ‘사해루’, ‘금곡원’, ‘중화루’, ‘공화춘’ 등 고급 중국요리점도 속속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화인이 10만 명에 달하면서 경성과 인천에서는 대형 중국요리점이 번성했다. 이들 중국요리점은 일본 요정에 비해 민족 운동가들이 반식민지 활동을 하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19년 1월 기독청년회 학생부 간사 박희도를 중심으로 경성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 8명이 만세운동에 참가를 결의한 곳은 경성의 중국요리점 ‘대관원’이었고, 그해 4월 13도 대표 23명이 모여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등을 낭독한 곳 역시 경성의 ‘봉춘관’이었다.
한국에서 성장을 이어오던 중국요리업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외국인특별토지법’을 비롯한 규제를 받으며 타격을 받은 뒤 상당수 화인들이 타이완이나 일본, 미국 등지로 떠났다. 이 틈을 비집고 중국요리점 경영자가 대거 한국인으로 교체됐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중국요리들은 한국화가 급격히 진전됐다. 자장면이 검어지고, 짬뽕은 더욱 매워졌으며, 탕수욕 역시 기름기가 줄었다. 짜장면을 재해석한 ‘짜파게티’나 ‘짜짜로니’ 같은 인스턴트 식품도 널리 퍼져갔다.
그렇다면 중국요리는 어떻게 이렇게나 큰 세계적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저자는 중국요리가 다른 나라 요리보다 현지 식재료에 대응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중국계 이민자가 많고 역사가 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첫째로, 100도 이하의 물로 익혀 재료에서 맛을 끌어내는 것이 기본인 일본 요리 등과 비교하면 200~300도의 기름으로 볶거나 튀기고 조미료를 통해 외부적으로 맛을 주입하는 것이 기본인 중국요리 쪽이 미지의 현지 식재료에 대응하기 쉬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중국계 이민자의 많은 인구와 오랜 역사를 들 수 있다. 각종 통계에 따르면, 중국 국외의 화인 인구는 약 4000만~6000만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되며 그 중 70~80퍼센트가 동남아시에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많은 중국인이 국외로 떠난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먼저 이민한 동족 동향자를 연고로 하여 이민하는 연쇄 이민이 늘었다.”(252쪽)
중국요리는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각국의 국민음식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잡채의 경우 중국요리의 영향 아래 일본의 식문화까지 더해지면서 새롭게 재탄생한 한국의 대표 요리가 됐다.
책은 격변하는 근현대사 속에서 중국인들과 중국요리가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와 얽힌 궤적을 방대하게 추적한다. 그러면서 음식에 관한 거짓된 전승인 ‘음식의 페이크로어(culinary fakelore)’를 경계한다. 저자는 식문화사 분야에서 사실에 상반되는 설들이 유포되거나 속설이 사실화하는 경우가 많다며 중국 요리에 얽힌 기원과 설을 세밀하게 검증하려 시도했다.
예를 들면, 청조의 궁정 요리로 연상되는 ‘만한전석’은 실제로는 19, 20세기 민간에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한편, ‘동파육’ 요리 역시 명대에 북송 시인 소동파를 숭배하는 문인 관료들이 이를 연회에 내오던 가운데 등장했다는 것을 사료를 통해 고증한다. 우리가 중국의 대표 요리로 알고 있는 베이징덕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 유명해졌고, 중국 음식점에서 자주 접하는 회전 테이블이 일본에서 탄생했다는 설 역시 잘못이라고 바로잡는다.
책은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중국요리의 역사와 실제, 각국의 현지화 양상과 특징 등을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리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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