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일어난 전투,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맹활약
평양전투의 숨겨진 수훈자인 고려 조정의 중신
10만 거란군 중 수천명만 생존해 도망간 귀주대첩
11세기 고려와 거란(요나라)사이에 26년간 벌어졌던 ‘여요전쟁’을 다룬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인기다. 10회 기준 시청률 10%를 달성했고, 광고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2049세대 시청률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국내 사극 드라마·영화 영상물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고려시대를 극화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고려거란전쟁은 실제 역사를 극화했으므로, 당대 역사 사실을 알고 보면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전체 32부작 중 3분의 1을 넘은 지금까지 나왔거나 앞으로 나올 역사적 기록 중 알고 보면 더 재미있을 몇가지 사실을 소개한다.
◆영하 10도에 평안도 산길을 누볐던 양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다루는 기간은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에서 현종으로 고려 국왕이 교체되고, 이를 요 성종(야율융서)가 문제 삼아 고려를 침략한 2차 여요전쟁(1011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요나라 군 10만이 크게 패배한 3차 여요전쟁(1019년)년까지의 10년이다.
현재까지 방영된 내용 중 시청자들의 관심을 크게 끈 대목은 서북면도순검사 양규의 맹활약이다. 2차 여요전쟁때 활약한 양규는 거란군 40만명에 맞서 흥화진(현재의 평안북도 의주)성을 지켜냈고 고려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까지 치고 내려간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포로로 잡힌 수많은 고려인들을 구해낸다. 조선시대때 쓰여진 역사서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양규를 비롯한 고려군이 구해낸 거란군 포로 고려인은 3만명에 달한다.
양규의 수많은 행적 중 드라마에도 등장했고, 많은 시청자들의 감동을 자아내게 한 장면은 곽주성(현재의 평안북도 곽산) 구원이다. 흥화진성을 함락하지 못한 거란군은 근방 무로대에 20만명의 대군을 주둔시켜 흥화진을 경계하게 한 뒤 서경(현재의 평양)과 개경으로 진격하는데 이를 파악한 양규는 700명의 군사를 데리고 흥화진을 몰래 빠져나간 뒤, 거란군이 함락하지 못한 통주(현재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1000명의 군사를 규합해 총 1700명의 군사로 6000명의 거란군이 주둔하고 있던 곽주성을 탈환한다. 고려사는 양규가 “잔류한 거란군사들을 습격해 모두 목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십만명의 거란군은 고려 내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거점이었던 곽주성을 잃어버렸고 이는 이후 거란군이 개경을 떠나 도망쳤던 현종을 끝내 추격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양규의 곽주성 탈환이 2차 여요전쟁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였던 셈이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양규의 곽주성 탈환은 1010년 12월 말에 일어났다. 양력으로 따지면 1월초의 한겨울이다. 아울러 고려사는 양규가 곽주성을 ‘밤중에’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즉, 양규는 한겨울에 의주→선천→곽산에 걸쳐 이동해 밤중에 곽주성을 공격해 점령했다는 뜻이 된다. 아울러 이 시기 거란군은 흥화진 견제 및 후방 보급로 확보를 위해 20만명의 거란군을 흥화진 근처의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양규로서는 이 거란군에 맞서기보다 피해서 곽산까지 내려갔을 확률이 크다. 즉, 양규는 수십만의 거란군을 피해 평안북도 산악지역을 한겨울 밤에 주파했던 것이다.
기상청이 발간한 ‘북한기상 30년도’ 책자에 의하면 평안북도 신의주와 구성의 12월, 1월 평균기온은 영하 5도에서 6도를 오간다. 대규모 거란군을 피해 산길을 오갔을 확률이 높았을 당시 고려군은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 평안북도 산길을 오갔을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고려사는 이 시기 곽주성에 유성이 떨어졌다고 기록했다. 양규가 곽주성을 점령한 이후인지, 이전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전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대분수령 평양전투의 수훈자는 누구
양규의 분전이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최종 승리를 얻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지만 나머지 고려군 장수들의 활약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전투가 서경, 즉 현재의 평양에서 벌어진 전투다. 1010년 음력 11월24일 통주에서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30만 대군을 격파한 거란군은 기세를 모아 12월 9일 평양성 문앞에 도달한다. 이때부터 12월 17일까지 약 일주일여간 평양을 공격하지만 강민첨·조원을 위시한 평양의 군대와 백성들은 성을 사수하는데 성공하고 결국 거란군은 평양을 점령하지 못한 채 개경으로 향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려시대에도 평양은 한반도 서북지역의 중심도시이자 많은 물자들이 모이는 거점이었다. 거란군이 평양성을 점령했다면 좀 더 쉬운 고려 공략이 가능했다. 거란군이 평양을 점령하지 못했던 건 2차 여요전쟁의 또다른 분수령 중 하나다.
이 평양 전투는 숱한 우연이 아니었다면 고려군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드라마에서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당시 서경부유수 원종석은 평양성을 열고 거란군에 항복하려 했다. 심지어 항복 표문을 작성해 요 성종에게 전달하려 했다. 이때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동북면 도순검사 탁사정이 이끄는 군대였다. 탁사정의 군대는 평양성 내의 주화파들을 죽이고 평양을 전시체제로 개편한다. 이후 탁사정은 거란군과 싸우다 도망가는 처지가 되지만, 탁사정이 평양성 내 주화파를 죽이는 극단적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평양이 거란을 상대로 성공적인 방어를 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탁사정이 이끄는 군대가 거란군이 평양성에 도달하기 직전 도착한 것은 고려 입장에서 천운에 가까웠다. 고려사는 동북면의 군대를 평양으로 파견한 명령을 내린 주체를 고려 조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동북면 군대는 함경도 함흥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고려 조정의 결정은 신속하게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말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을 당시, 통주 패배 후 이 소식이 개경에 전달되기 까지는 파발마를 이용했어도 최소 이틀 이상이 걸린다. 다시 개경에서 함흥까지 동북면 군대를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리기까지는 또 이틀 이상이 걸린다. 지시를 받았어도 동북면 군대가 집결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또 평양까지 이동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을 것이 분명하다.
통주 전투(11월24일) 이후 평양성 앞에 거란군이 도착(12월9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주 남짓이었다. 즉, 당시 고려 조정이 하루 이틀이라도 동북면 군대를 평양으로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동북면군은 거란군 점령 후에 평양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 때 개경에서 즉각적으로 결정을 내린 국왕 현종과 빨리 보내야한다고 조언했을 고려 조정의 중신들이 숨어있는 당시 전쟁의 공로자였던 셈이다.
◆도망가지 않았던 현종, 지도자의 품격
2차 여요전쟁에서 개경을 피해 나주까지 피난을 가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국왕 현종은 9년뒤 벌어진 3차 여요전쟁에서는 거란군 침략에 만만의 준비를 갖춘다. 20만명의 고려군을 편성해 강감찬에 총 지휘를 맡겨 전선으로 올려보냈고 현종의 기대대로 강감찬은 흥화진과 평양일대에서 거란군을 수차례 격파한다.
하지만 거란군은 강감찬의 본대를 피해 우회하여 개경으로 곧장 진격해버린다. 강감찬은 부하 김종현에게 1만명의 군대를 맡겨 거란군을 쫓으라고 지시하지만 김종현군보다 거란군이 훨씬 빨랐다.
1019년 음력 1월. 거란군 본대가 개경 인근 신은현(현재의 황해도 신계군)까지 진출한다. 개경까지의 거리는 백리(약 40km) 정도까지 다가온 코앞의 상황이었다.
당시 기록은 개경 내의 상황을 완벽하게 전해주진 않지만, 20만명이나 되는 고려군이 개경밖으로 나가있던 만큼 개경 내에 고려군은 소수였을 확률이 높다. 거란군이 이를 의도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현종은 이 상황에서 개경의 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농성을 하는 선택을 내린다. 개경 주위의 주민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냈고 주위 논밭을 모두 망가뜨리는 ‘청야전술’을 실시한다. 수백키로의 거리를 보급물품없이 질주한 거란군은 개경 점령으로 식량을 확보하려는 계획을 짰을 확률이 높지만, 현종의 청야전술로 이는 무산된다.
이후 거란군은 속임수를 써서 개경의 성문을 열려고 시도하는데 이를 위해 다가온 거란군 기병 300기를 고려군 100명이 죽였다고 기록은 쓰고 있다. 당시 정황상 여기서 등장하는 고려군은 현종을 호위하기 위해 남았을 근위대였을 확률도 있다. 결국 거란군은 개경을 지키는 현종의 의지에 밀려 개경 공성을 포기했고 길을 돌린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들을 뒤쫒은 끝에 1019년 2월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에서 10만의 거란군이 크게 패배한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기록은 거란군 중 살아서 도망간 사람은 단 수천명이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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