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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주하게 될 노년의 삶… 生의 연약함에 공감·연민

입력 : 2024-03-21 20:33:56 수정 : 2024-03-21 21: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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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포도뮤지엄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알란 벨처·정연두·민예은·로버트 테리엔…
국내외 작가 10인의 기억·그리움 담아

인지저하증 어머니의 밝은 모습 사진으로
기억 소실 과정 음악·회화 통해 형상화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회복 등 연출

정체성 상실·고독·노화·기억 상실에도…
아름다운 인간 존재 탐색·세대 간 공감

여름비가 내리자 배롱나무 앞에는 작은 샘이 생겨난다. 풍성한 잎사귀들이 한껏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 사이로 붉은 꽃들이 큼지막하게 피어오른다.

뒤편 벽면에는 추억의 비디오 영상들이 투영된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 꼭두각시 춤을 추는 학예회,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 싱글벙글 가족 야유회 등 영화 같은 장면들이 지난 인생의 한 순간들을 불러들인다. 깔리는 음악이나 채집된 사운드 또한 감미롭다. 영롱하고 신선하며 감각적이어서 쉽사리 평온해진다.

김희영, ‘Forget Me Not(포겟 미 낫)’

찬란한 가을색이 드리워지다가 눈이 내리면 배롱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만다. 잠시 암전. 이어서 공간 가득 확 퍼져나는 붉은 석양은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때는 상여소리를 포함한 음향효과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하늘과 구름, 그리고 별이 흐른다. 나무는 별들을 흡수하듯 빨아들이고, 이곳저곳에서 봄처럼 다시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기억이 소멸해도, 사랑은 더욱 근원적인 형태로 남아 우리와 함께한다.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가 미술관의 전시장 하나를 온전히 차지한 채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고 있다.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백 일 동안 꽃이 피어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는 길고 긴 기다림의 미학을 상징한다. 6m에 이르는 이 나무는 전시장으로 옮겨져 녹음이 우거진 숲 한가운데 생명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고, 초록 잎을 무성히 내뿜는가 하면, 화려하게 꽃 피우다 노쇠한 겨울을 맞아 모든 여정을 마치고 별이 되어 돌아간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현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면 다시금 발아하는 생명의 순환과 부단한 회복을 암시한다.

알란 벨처, ‘바탕화면’

만물 속에 재생되는 나무의 기억들을 몰입형 설치미술로 표현한 이 공간에는 여덟 대의 프로젝터가 사용됐다. 총괄디렉터 김희영이 연출한 8분짜리 영상작품(프로젝션 매핑) ‘Forget Me Not(포겟 미 낫)’이다.

노년의 삶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온기를 더하고 세대 간의 공감을 꾀하는 전시회가 눈길을 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포도뮤지엄이 마련한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이다.

노화에 따른 인지저하증(치매)을 매개로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예술의 시각으로 탐구한다. 누구나 마주하게 될 삶의 후반기를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초고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점차 많은 인구가 겪게 될 인지저하증을 처참한 질병이 아닌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사회적 공감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루이스 부르주아, ‘밀실1’

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정연두, 민예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데이비스 벅스, 시오타 지하루, 천경우 등 국내외 작가 10인이 기억과 그리움을 심도 있게 들여다본다. 인간이 겪는 정체성 상실과 고독에 관해 이야기하고, 노화와 기억 상실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인간 존재를 탐색한다.

알란 벨처의 작품 ‘바탕화면’은 수년간 방치되었던 노트북을 다시 켠 것처럼 깨진 이미지 파일들이 벽면에 즐비하다. JPEG(.jpg) 파일의 디지털 아이콘들은 클릭할 수 없게 단단히 굳은 세라믹 형체로 변환되었다. 관람객들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무력감을 상기하며 기억이 사라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쉐릴 세인트 온지,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 서 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앙상한 철제 침대, 유리병과 의료도구들은 누군가의 고립된 세월과 심리적 경계를 유추하게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밀실 1’이다.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다.

셰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는 인지저하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찍은 사진 작품들이다. 기억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는 듯한 어머니의 밝은 모습을 포착해, 인지저하증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꾀한다.

정연두, ‘수공기억’

정연두의 ‘수공기억’은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노인들의 기억을 무대 세트로 가공해 기억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비교하는 55분짜리 영상미술이다. 왼쪽 화면에서는 여섯 명의 노인이 등장해 자신의 과거 기억을 구술하고, 오른쪽 화면에서는 붉은 작업복 사람들이 마치 무대 세트를 꾸미듯 이야기 속 장면들을 재현한다.

민예은,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

방의 모퉁이를 썰어낸 듯한 기하학적 형태의 입체 작품들이 전시실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누군가의 한 시절 기억을 구성하는 공간이 작은 조각으로 해체되어 공중을 떠다닌다.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는 소환할 때마다 매 순간 왜곡되거나 재구성되는 기억의 본질적인 모순과 허구성을 포착한다.

로버트 테리엔, ‘무제(패널룸)’

로버트 테리엔의 ‘무제 (패널룸)’은 공간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이 방은 무엇을 위한 방일까? 탬버린은 왜 바닥 한가운데에 포개어져 있을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의 문을 열면 무엇이 보일까? 작가는 익숙한 사물을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연출함으로써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해 각자의 잠재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더 케어테이커 & 이반 실,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와 화가 이반 실의 공동작업 ‘텅 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는 인지저하증으로 기억이 점차 소실되어 가는 과정을 음악과 회화를 통해 형상화한 컬래버 작품이다. 음반은 초반 22분까진 아름다운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반면, 후반 20분은 굉음과 소음이 개입해 식별할 수 없는 울림이 되어간다. 열한 점 그림 속 정지해 있는 대상은 본래 형상으로 되돌아가고자 변화하지만, 점점 더 추상적이고 모호해질 뿐이다.

데이비스 벅스, ‘재구성된 풍경’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의 풍경이 파편화되어 부서진 일상처럼 펼쳐져 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듯 조각난 캔버스와 합판은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데이비스 벅스의 ‘재구성된 풍경’ 연작은 쓰임을 다 했거나 버려진 합판들 위에 풍경화를 그려 파괴한 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오타 치하루, ‘끝없는 선’

중앙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책상 위로 문자들이 공중에 흩어진다. 시오타 지하루의 ‘끝없는 선’은 문자 또는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무한한 생각과 감정, 기억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책상은 기억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과정의 상징물이다. 주로 편지나 문서 작업을 위한 글쓰기에 사용되었다.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해 온 무한한 텍스트들이 구조를 잃고 해체되면 무엇이 남을까?

 

천경우의 ‘가장 아름다운’은 관객이 눈을 감고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그리는 참여형 퍼포먼스 프로젝트로, 가장 소중한 대상임에도 온전히 재현해 낼 수 없는 경험을 관객에게 부여한다.

천경우, ‘가장 아름다운’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노화나 인지저하증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한다.

‘기억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시선’이란 수식어가 달린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말까지 1년 동안 관객과 만난다.


제주=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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