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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반려가 있냐’고 묻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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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9 22:47:20 수정 : 2024-03-29 22: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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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환상통’ 쓴 김혜순 시인엔
환상콤비인 최돈미 번역가 있어
15년 동안 깊이있게 서로를 번역
반려로 소통한 세월 賞으로 보답

작가에게 반려는 독자가 아닐까. 문장으로 연결되어 교감하는 사람, 작품에 투영된 일상적 사건이나 내적 갈등, 실존적 고민을 공감해주는 기적 같은 존재. 최초의 독자는 편집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작품을 예리한 시각으로 읽은 편집자와 대화할 땐 몹시 부끄럽지만 결과적으로 안정감을 얻게 된다.

자신의 책이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독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독자 중에 그 텍스트를 사랑하는 탁월한 번역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물론 번역가가 작업을 끝낸 이후에도 해당 언어권 국가의 영향력 있는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출판되어야 하니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이듬 시인

이따금 동료작가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어떻게 하면 해외에서 번역서를 낼 수 있어요? 수상하게 된 요인이 뭘까요?”

나의 시 몇 편이 번역되어 앤솔러지에 묶인 적은 몇 차례 있었지만, 시집이 본격적으로 번역의 기류를 타게 된 건 12년 전 가을쯤이었다. 그해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온 시인이자 교수인 요하네스 고란슨이 나의 작품을 읽고 깜짝 놀랐다며 적극적으로 번역시집 출간을 제안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국내외 작가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이 확대된다면 더 많은 작가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시가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어렵고 읽는 사람도 적다고 해도, 한국의 시들이 세계 멀리까지 나아가서 멋진 소식을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번역가들의 열정과 재능을 뒷받침해주는 경제적 지원도 필요하다.

지난 3월12일에 전미도서비평가협회는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 영역본인 ‘팬텀 페인 윙즈’(Phantom Pain Wings)를 시 부문 수상작으로 발표했다. 기쁨과 축하가 넘치는 소식이었다. 실제로 김혜순 시인은 짐작보다 훨씬 더 해외에서 사랑과 호평을 받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전역에서 그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2019년 5월에 목격한 일이다. 당시 덴마크 코펜하겐 문학 행사에 김혜순 시인과 내가 초청되었다. 김혜순 시인의 낭독회와 북토크가 열린 뮤지엄엔 열광적인 독자와 출판 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 김혜순 시인이 먼저 한국어로 시를 읽으면 교차적으로 최돈미 시인이 번역본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한 편의 낭독이 끝날 때마다 어마어마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퍼졌다. 낭독 이후엔 객석에서 감상과 질문들이 쏟아졌다. 시인과 번역자는 황금 콤비처럼 서로에 대한 두터운 이해와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최돈미 시인과 함께 썼기에 그녀와 함께 상을 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혜순 시인의 이번 수상 소감 중에 사려 깊은 이 문장이 유독 인상적이지 않은가. 마치 공동창작한 것처럼 표현한 데는 반려로 소통해온 세월이 쌓였을 것이다. 최돈미 시인이자 번역가는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김혜순 시인의 많은 시집을 차곡차곡 치열하게 번역하며 뜨거운 언어의 깊이를 통렬하게 감각했을 것이다.

코펜하겐에서 나의 단짝이었던 번역가 L을 이듬해 텍사스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는 댈러스, 오스틴, 휴스턴 등 도시를 돌며 낭독회를 했고 최종적으로 샌안토니오 AWP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해 나의 장편소설이 댈러스 딥 벨럼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시집뿐만 아니라 소설책까지 번역해준 번역가 L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L은 유명한 카페와 서점, 출판사 등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기획했는데, 그녀의 사전 준비부터 진행 마무리까지 놀라울 정도로 매혹적이며 완벽했다. 그러나 8일째 되는 밤, 잠자리 문제로 우리는 충돌했다. 낯선 이의 거실 한구석 에어 매트리스를 내게 제공한 L이 자신의 연인과 호텔로 갔기 때문이다. L이 지향하는 오픈 릴레이션십은 존중할 수 있지만,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해준 내 몫의 숙소비용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내겐 “L 시인과 함께 썼다”는 연대의식이 모자랐다. 역지사지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라는 텍스트를 번역했다면 공감과 깊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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