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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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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23 23:33:40 수정 : 2024-04-23 23: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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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비가 많이 내렸잖니. 엄마가 불쑥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가에 꽤 오랜만에 들른 덕에 잘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은 나는 성의껏 말을 받았다. 그랬지, 그래서 벚꽃이 전부 떨어졌지. 엄마는 골똘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더니 그 빗속에 웬 사람이 있는 거야, 하고 말했다.

엄마의 얘기는 이랬다. “전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어. 역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원체 가파르니까 숨을 좀 고르려는데 계단 입구 옆에 사람이 있더라고. 처마가 짧아 비가 다 들이치는데 꼼짝도 않고, 비가 쏟아지는 길만 보고 있는 거야, 휠체어에 앉아서. 그냥 가자니 영 마음이 쓰여 물어봤지. 아저씨, 우산 없으세요? 내 우산을 내밀었더니 됐대. 괜찮다고 쓰시라고 했더니 한사코 됐대. 그러면서 우산을 들면 휠체어를 못 밀어서요, 하는 거야. 다시 보니까 간소하게 생긴 게 전동 휠체어가 아니더라고. 양손으로 바퀴를 굴려야 하니 우산을 들 수가 없는 거지. 어디까지 가시냐고 물었더니 길 건너 병원 장례식장에 간대. 제가 우산을 받쳐드릴 테니까 거기까지 같이 가요, 했더니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거야. 아는 사람이 곧 올거라고, 괜찮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 신경쓰인다고 엄마는 말했다. “약속 시간이 빠듯해서 내가 좀 망설였거든. 망설이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는지도 몰라. 그러니 사람이 온다고 거짓말로 거절한 거 아닐까.”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철역에서 장례식장까지는 내 걸음으로 오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칠십 대인 엄마 걸음으로는 십 분쯤, 휠체어로는 얼마나 걸릴까. 나는 단차가 높고 폭이 좁은 그 거리의 보도를 떠올렸다. 빗줄기가 굵은 날 휠체어를 탄 사람과 서툴게 우산을 받친 사람이 나란히 걷기 좋은 길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누가 좀 도와줬으면 했는데 다들 바쁘더라.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휙휙 지나가버리니 거기 있는 사람을 못 보는 거야. 나는 무릎이 아파 천천히 걸으니까 아무래도 보이지. 그 계단 아래가, 거기 계속 멈춰 있는 그 사람이.” 약속 장소에 가서도 내내 마음이 쓰였다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눈에 밟힌다고 엄마는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가 지났을 좁고 불편한 길 때문이었다. 오래된 거리의 그 길은 미묘하게 경사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날 사람들이 많이 미끄러졌다. 상점들이 어지럽게 내놓은 입간판과 홍보패널 때문에 그나마 좁은 길의 절반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니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장례식장까지 차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라면 우산을 받쳐들고 그와 함께 차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전에 나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빠른 걸음으로 급행 열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계단을 뛰어오르기 일쑤인 나는, 휴대폰 속 좁은 화면을 응시하느라 주변을 거의 둘러보지 않는 나는 아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한 사람만이 약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세계에 나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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