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들 의료공백에 경영난 심화
일방적인 결제 연장 통보 속출
“2023년 납품 대금 아직도 못 받아
몇 달 후엔 직원 월급주기도 빠듯”
간호사 등 노동자도 생계 위협
“정부, 중기·노동자 대책 마련을”
“병원이 대금 지급을 계속 미루면 파산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미 매출은 반 토막 난 지 오래예요.”
서울대병원에 의료소모품을 납품하는 A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A씨의 회사는 서울대병원의 구매대행사에 일회용 의약품 주입기나 신체삽입관(카테터) 등 병원에서 사용하는 소모품을 납품했다. 이렇게 납품하고 나면 구매대행사 측이 대금을 3개월 이내로 지급했다.
하지만 지난달 구매대행사는 A씨에게 “의료공백 사태 장기화로 서울대병원의 자금 압박이 심각하다”며 지난해 12월29일 납품 건에 대한 결제를 6월로 미루겠다고 통보했다. 전공의 이탈이 본격화하기 이전의 납품 건인데도 대금 지급을 일방적으로 미룬 것이다. A씨는 “1월 납품 건의 대금을 이번 달에 받아야 하지만 받지 못했다”며 “우리처럼 종합병원에 납품하는 회사들은 줄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토로했다.
전공의 집단행동이 장기화하면서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이뤄진 의료산업 생태계가 줄줄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병원들이 의사를 제외한 간호사나 병원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은 데 이어, 협력업체에 대한 대금 지급까지 늦추며 위기가 노동·산업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24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료기기 납품업체의 대다수가 중소 규모인 탓에 의·정 갈등에 따른 피해가 극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양대 구리병원에 의료기기를 납품하는 소규모 대리점 대표 B씨는 이번 달 받을 예정인 대금에 대해 ‘1개월 연장’을 통보받았다. B씨는 “병원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우리 같은 업체에 줄 대금 정도는 유보금에서 지급할 수 있을 텐데 미루고 있다”며 “당장 어음으로 버티고 있지만 몇 달 지나면 직원들 월급 주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의료기기협회 관계자는 “업계 관례상 물품을 외상으로 선공급하고 병원과 간납업체(구매대행사)를 통해 대금을 나중에 받는 경우가 많다”며 “병원이 업체 쪽에 일방적으로 대금 지급 연장을 통보하기보단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대란이 장기화하자 이른바 ‘빅5’ 병원은 경영난을 이유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청소노동자 등에 대한 근로시간 감축과 무급휴가 등을 권장하고 있다. 지난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가 간병노동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공의 집단이탈로 간병사 근무일은 주 3.91일에서 2.25일로 감소했고 기본급은 월평균 42%가량 줄었다.
고통 분담에서 의·정 갈등의 주체인 의사는 제외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지난 19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는데 의사를 제외한 일반직 직원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일부 병원은 구조조정까지 거론되고 있다.
경기권의 한 종합병원 소속 간호사 이모(29)씨는 “병원 상황을 알다 보니 무급휴가까지는 이해하고 있지만, 퇴직 권장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의료연대 서울대병원분회는 전날 병원의 비상경영 체제 돌입에 대해 비판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노동자를 쥐어짜는 비상경영을 선포할 것이 아니라, 공공의료 비상을 선포하고 지역·필수 의료 중추기관을 위한 국립대병원 세부대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나래 서울대분회 사무장은 “병원이 간호사, 청소노동자 등 전 부서에 무급휴가를 권장하는 분위기를 확대하고 있다”며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반강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대란에 따른 환자 보호는 물론, 중소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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