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조경란의얇은소설]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관련이슈 조경란의 얇은소설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4-06-13 23:11:58 수정 : 2024-06-13 23:11:5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노년 여성의 우정 그린 소설 보며
책속의 귀한 관계 부러워도 하고
부족한 현실의 욕망을 채우기도
독서란 좀더 좋은 상태가 되는 것

마거릿 애트우드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스톤 매트리스’에 수록, 양미래 옮김, 황금가지)

이제 노년이 된 세 여자 친구들이 있다. 밤에 뱀파이어 영화를 보는 게 취미인 캐리스. 명예교수이며 사물이나 사물, 그게 뭐가 됐건 제자리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토니. 굽 높은 구두를 좋아했지만 무지외반증이 생기면서 운동화만 신게 된 로즈. 토니와 로즈는 각각 남편이 있고 캐리스는 두 친구가 생각하기에 옛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해 아직 혼자이다. 토니와 로즈는 사람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고 제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친구 캐리스가 걱정돼 유기견을 입양해준다. 유기견의 이름은 위다. 개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는 19세기 소설가의 이름에서 따와 역사학자인 토니가 지었다.

조경란 소설가

그렇다면 이 단편소설 제목에 나오는 인물 ‘지니아’는 누구일까? 예전에 이들은 지니아까지, 네 명이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었다. 옷을 잘 입고 화려해 보이고 매혹적이었던 지니아가 거짓말을 달고 산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지니아는 차례로 토니의 남자친구를, 다음엔 로즈의 남자친구를 ‘빼앗았다’. 당시에 캐리스는 남자친구 빌리와 섬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빌리는 닭장을 짓고 닭을 키우고 캐리스는 달걀로 만든 각종 빵을 구우며. 거기에 지니아가 나타났다. 병에 걸렸는데 자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캐리스는 천성적으로 “환대하는 마음과 뭐든 나누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좁은 집에 지니아를 위한 공간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 후, 빌리와 지니아 두 사람은 도망가 버렸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어도 세 친구에게 지니아는 여전히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캐리스가 두 친구에게 말했다. 꿈에 지니아가 나타났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고. 토니와 로스는 다시 캐리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한 달 전에 갑자기 빌리가 나타났기 때문에. 중년기를 거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캐리스가 자신의 하우스에 유지 관리와 보수를 맡길 세입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낸 후였다. 캐리스가 또 빌리에게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 친구들은 약속을 늘렸다. 일주일에 한 번 같이 뱀파이어 영화를 보고 토요일마다 산책을 하는 것 외에 수요일엔 점심을 먹기로. 자신들처럼 “조금 구식이고 낡았지만 편안한 공간”에서. 그 자리에서 친구들은 알게 되었다. 캐리스가 자신들이 아니라 빌리와 영화를 보고 캐리스의 하우스를 투자 개념으로 숙박 시설로 돌리자는 그의 말에 관심 두고 있다는 걸. 걱정하던 두 친구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위다한테 기도하자고. 위다가 캐리스를 지킬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결국 빌리는 기혼 여자 등쳐 먹기, 다단계 금융 사기, 신원 도용 등 사기꾼으로 밝혀졌고 그를 처음부터 싫어했던 개 위다는 친구들의 바람처럼 제 주인인 캐리스를 위해 빌리에게 어떤 행동을 가한다. 토니와 로즈, 그리고 캐리스는 꿈에 나타난 그들의 말썽 많았던 옛 친구 지니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니아의 이가 새빨간 이유를 위다와 연관시키면서. 좋은 면을 보자고. 어쩌면 지니아는 캐리스에게 빌리를 조심하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 호의로 꿈에 나타난 것이며, 지니아가 예전에 자기들에게 저지른 일은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고.

‘스톤 매트리스’에는 부커상 2회 수상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단편 아홉 편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노년 여성의 복수극인 동명의 단편, 그리고 ‘나이 든 세대’를 젊은 시위대가 밀어내버리는 ‘먼지 더미 불태우기’가 문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편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나는 유머가 있고 유쾌하기까지 한 ‘이가 새빨간 지니아가 나오는 꿈’을 선택했는데, 이 단편이 나이 든 여성들의 우정을 그리고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지금 내가 원하는 것, 나에게 부족한 것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우정을 나누며 같이 산책하고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그런 귀한 관계 말이다. 이렇게 독서란 가끔 자기중심적이며 부족한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는 능동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읽기 전보다는 조금은 나은 상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조경란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카리나 '아자!'
  • 카리나 '아자!'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