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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권력 잃은 독재자…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이야기”

입력 : 2024-07-03 06:00:00 수정 : 2024-07-02 20: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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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퓌 리바넬리 장편소설 ‘호랑이 등에서’

가택연금 지켜본 군의관 기록 바탕
오스만제국 압둘하미드 2세 삶·심리
치밀한 구성·유려한 문장으로 그려

"우리는 모두 호랑이 등에서 태어난 거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을 땐
모두를 복종케하는 엄청난 권력을 갖지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발밑에 잡아둔 가젤처럼 찢어놓을 거야"

제국이 불치병을 앓고 시름시름하던 1876년, 그는 제34대 술탄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재위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정치를 펼치고 근대화에 힘쓰는 한편, 주요 강대국 간 대립과 갈등을 이용해 제국의 지배권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크레타 섬을 상실한 전후 폭군으로 돌변,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을 학살하고 아르메니아 독립을 추구한 지도자 일디즈를 암살하는 등 정치적 반대파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서방에는 ‘붉은 술탄’으로 풍자됐다.

오스만제국의 절대 권력자 압둘하미드 2세는 결국 서구식 근대화를 열망하는 군인들의 쿠데타, 이른바 ‘청년투르크당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인 1909년 강제로 폐위됐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33년간 구석구석 통치한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가족과 함께 이스탄불과 떨어진 테살로니키의 한 저택에 감금당한다.

튀르키예의 르네상스적 작가 쥴퓌 리바넬리의 장편소설 ‘호랑이 등에서’가 최근 번역 출간됐다. 작품은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은 오스만제국 술탄의 삶과 심리를 치밀한 구성과 유장한 문장으로 그렸다. 호밀밭출판사 제공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하루아침에 저택에 감금당한 독재자의 심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작가 쥴퓌 리바넬리는 권력의 정점에서 한순간에 유배자로 추락한 절대 권력자의 삶과 심리를 소설로 그려보고 싶었다. 자신 역시 오래전 군사 쿠데타에 반대했다가 세 차례나 구속돼 군 형무소로 수감됐고 11년간이나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건 3개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을 33년 동안 통치했던, 그의 말이 곧 법인 절대 권력을 소유한 황제가 하룻밤 사이에 폐위당한 채 모든 걸 잃고 가족과 함께 텅 빈 저택에 연금당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상황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정신적 충격과, 그 충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제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는 독재자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습니다만.”

그는 이를 위해 많은 사료와 자료를 살피고 수집하면서 압둘하미드 2세는 물론 오스만 제국사를 조사 연구해야 했다. 이와 함께 압둘하미드 2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기록도 찬찬히 들여다봤다.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은 오스만제국 압둘하미드 2세의 삶과 심리를 치밀한 구성과 유장한 문장으로 그린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의 장편소설 ‘호랑이 등에서’(오진혁 옮김, 호밀밭)가 최근 번역 출간됐다.

“태어나자마자 날 호랑이 등에 태웠던 거야…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을 땐 모두를 복종케 하는 엄청난 권력을 갖지. 힘도 있고 행복하겠지만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호랑이는 발밑에 잡아 둔 가젤처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야.”

소설은 절대 권력자인 술탄에서 하루아침에 폐위를 당해 가택 연금 생활을 하게 된 압둘하미드 2세가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시작된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로 테살로니키의 저택에서 생활하는 황제는 누군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처형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늘 시달린다.

이때 자유주의적 성향의 젊은 군의관 아트프 휴세인 대위가 가택 연금 중인 압둘하미드 2세와 그의 가족을 진찰하는 주치의로 임명된다. 군의관 휴세인이 마주한 황제는 궁전에 앉아서 음모나 꾸미고 잔혹한 살인을 명령하는 학살자이자 독재자라는 상상이나 소문과 달리 왜소하고 불안에 떠는 노인에 불과했다. 노인은 군의관에게 자신이 제국을 얼마나 통치를 잘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인지를 설명하곤 했다. 군의관은 술탄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나중에 질문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폭군에다 양심도 없는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를 힘들게 하는 겁쟁이에다가 가족을 사랑하는, 피해망상을 앓고 있는 가엾은 환자처럼 느껴집니다. 가끔은 혹시 그 유명한 술수로 저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군의관은 끊임없이 폐위된 황제를 부정하지만 어느 순간 독재자 편에서 사고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소름이 돋는 등 인간적 고뇌에 빠져간다. 그러면서 유배 기간 압둘하미드 2세와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 글을 남긴다. 소설은 3년 6개월간의 테살로니키 유배 생활을 마친 황제가 이스탄불에서 새롭게 감금 생활을 이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오르한 파묵을 잇는 ‘튀르키예의 문제적 작가’ 쥴퓌 리바넬리가 그린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삶과 심리는 어떤 모습일까. 이 문제적 작가의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리바넬리를 최근 번역가 오진혁씨의 도움을 받아서 이메일로 만났다.

―압둘하미드 2세가 군의관 휴세인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군의관이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은 실화인가. 소설과 실화의 차이는.

“실화다. 군의관이 아무도 모르게 기록으로 남겼던 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로 증오했던 두 사람, 황제와 군의관의 관계는 소설에서 요구되는 긴장과 감정 충돌을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물론 군의관의 메모와 일기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사건의 전개를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 건 사실이다.”

―권력을 잃고 노인이 된 독재자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군의관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재자의 심리는 또 무엇이었을까.

“폐위된 독재자와 그 독재자를 증오하는 군의관, 이런 긴장감 속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지위를 벗어던지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바뀐다. 지위, 계급, 군복과 같은 것들이 두 사람 사이에서 사라지면서 늙고 지친 한 병자와 젊고 이상주의에 빠진 혁명가 사이에 인간적인 요소들이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었다.”

―결국 압둘하미드 2세는 어떤 존재인가. 반개혁적 독재자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노인일 뿐인가.

“둘 다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압둘하미드 2세는 제국주의가 붕괴하고 왕과 왕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혁명의 시기에, 피해망상 환자로 33년 동안 황궁 밖을 나가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서구화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은 그의 제국을 산산조각 내려 했다. 그는 인생을 사냥꾼으로부터 자기 목숨을 지키려는 사냥감처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튀르키예 콘야에서 법조인 가문에서 태어난 쥴퓌 리바넬리는 1978년 첫 번째 단편소설집 ‘연옥의 아이’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소설 ‘콘스탄티노플의 내시’, ‘레일라의 집’, ‘살모사의 눈부심’, ‘마지막 섬’, ‘세레나데’, ‘호텔 콘스탄티노플’, ‘어부와 아들’ 등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최소 34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발칸문학상, 미국 반스앤노블 위대한작가상, 유누스나디문학상, 오르한 케말 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다. 300곡 이상의 자작곡과 30편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작곡했고, 4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튀르키예 국회의원과 유럽의회 의원까지 역임했다. 소설과 음악, 영화라는 열망의 바람을, 현실정치 참여라는 당위의 파도를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온 셈이다.

소설과 음악, 영화의 바람, 현실 정치의 파도가 쉼 없이 몰려올 때마다 마주해야 했고 지금도 마주하고 있는 쥴퓌 리바넬리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호랑이 등에 올라탄 자의 마음 아닐까. 그러니까 2016년부터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활동을 접고 오직 소설만 집필 중인 그는, 아마 지금도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콧구멍으로 거친 숨을 내뿜으며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지중해를 지나서 대서양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뛰어넘어 과거로, 미래로. 여기 지구를 떠나서 저 푸른 우주로….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집에서 선택하지 않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 우리는 모두 호랑이 등에서 태어난 거야.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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