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난 후 덮친 폭염의 기세가 무섭다. 잠시 바깥에 나가 있으면 등으로 가슴으로 땀이 흘러 옷이 흥건히 젖을 정도다. 에어컨 없이도 여름을 잘 지냈다는 강원도 고랭지도 이 더위를 피해가고 있지 못한다니, 언제쯤 이 더위의 끝을 볼 수 있을지.
폴 세잔이 강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린 수욕도를 마주했다. 싱그러운 청색과 녹색이 어울려 시원해 보이는데, 인물들을 다룬 방식은 좀 독특하다. 얼굴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몸과 동작 형태도 그저 물체들이 뒤섞이고 포개져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세잔은 아름다운 여인이나 시원한 여름 풍경을 그리려 하지 않았고, 물체들의 형태와 구조의 탐구를 목표로 했다. 당시 유행한 인상주의의 형태감 없는 색채가 혼란스럽다고 보았고, 그림 안에 입체감과 구조적 질서를 살려내려 했다. 물체 표면의 색은 변한다 하더라도, 입체적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잔은 “자연 속의 물체는 원통, 원추, 구로 환원하여 나타내야 한다”고 말했다. 붓질도 인상주의의 잘게 쪼갠 색 점들 대신 넓게 바른 색 면들로 나타냈다. 그래서 이 그림처럼 목욕하는 여인들 모습이 인물의 아름다움보다 입체적 형태감이 돋보이는 형식이 됐다. 입체적 구조와 형태라는 점에서 물체나 인물이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듯이.
또 세잔은 따뜻한 느낌의 황갈색이 도드라지는 인상을 주고, 차가운 느낌의 청록색이 움츠러드는 인상을 준다는 점도 이용해서 양감과 입체감을 살리려 했다. 이 그림에서는 황갈색과 청록색을 적절히 사용해서 색의 대비를 통한 양감과 입체감을 강조했고, 배경에도 똑같은 색채 사용법을 적용해서 인물과 배경이 조화와 일체감을 이루도록 했다. 그 결과, 그림이 견고하고 꽉 차 보이며 전체적으로 안정감도 주고 있다.
세잔의 이런 시도는 기하학적 구성에 의한 그림으로 향한 피카소의 큐비즘에 영향을 주었다. 인물을 조형적으로 분석한 후 재구성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이 그림을 모델로 해서 탄생했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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