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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사람 ‘짠내 나는 삶’… 파도처럼 펄떡이는 ‘물의 언어’로 그리다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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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8-14 06:00:00 수정 : 2024-08-13 21: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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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펴낸 권선희 시인

친구가 선물한 ‘글쟁이 운명’
여고생시절 친구 따라 백일장행
덜컥 입선… 세상보는 눈 깊어져
결혼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포항으로 간 ‘중대장 각시’
구룡포로 가족 ‘삶의 터전’ 옮겨
‘물것’과 ‘갯것’ 파도처럼 몰려와
지금까지 세번째 연작 시집 펴내

‘구룡포의 시인’으로 살아
외롭거나, 슬프거나, 기막히거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닷가삶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로 노래

“사람이 시인이고 글이 詩”
20년 포항서 살다 가평으로 이사
‘비린내 나는 삶’ 만나기 위해
오늘도 일찍 ‘꿈나라’로 떠난다

해녀 ‘형님‘들이 물에서 나올 시간에 맞춰 바구니를 들고 구룡포 선창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오늘 멍게 첫 작업 한다. 멍게 가지러 온나.” 새벽 해녀 형님에게서 멍게를 얻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은 그였다. 전에는 아무 때나 멍게를 잡았지만, 지금은 어촌계 규약에 따라 여름 한 철에만 작업했다.

오전 11시. 휘이~ 휘이~ 소리를 내며 물안경을 쓴 해녀들이 참았던 숨을 트면서 하나둘 물 위로 둥둥 뜨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물속으로 들어가 서너 시간씩 물질을 한 그들이었다. 먼저 물 위로 뜬 해녀는 바닷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확한 갯것을 어깨에 메고 시멘트 경사로를 올라서고 있었다.

 

신작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을 비롯해 20년 넘게 포항 구룡포 앞바다에 살면서 바닷가 사람들을 비롯해 ‘물것’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노래해 온 시인 권선희. 시간의 명령으로 지난해 12월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한 뒤 카페 ‘그래도’를 열었다.

이때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경사로를 오르려던 한 해녀가 물속으로 천천히 몸이 뒤집히는 게 아닌가. 팔순을 넘긴 춘자 형님이었다. 주위 해녀들이 깜짝 놀라 물에 잠긴 춘자 형님을 붙잡아 시멘트 위로 끌고 나왔다. 춘자 형님의 물옷을 찢기 시작했다. “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하라!” 해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춘자 형님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춘자야, 가믄 안 된데이, 살 거래이.” 한 해녀는 춘자 형님의 몸을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젊은 축에 속하는 또다른 해녀는 인공호흡을 했다. “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2년 전 7월2일 그날, 구룡포 해녀들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는 춘자 형님을 빙 둘러싸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시인 권선희는 문득 언젠가 뉴스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제주도 연안에서 죽은 고래를 몸으로 떠받치며 살리려던 고래들, 숨을 쉬지 않는 고래의 분기공을 한번 띄워 살려내려던 그 안간힘이.

구급차가 올 즈음, 마침내 춘자 형님이 턱 하고 숨을 뱉었다. 물인지 숨인지 입에서 아주 작게 톡 떨어지듯 터져 나왔다. 낯빛도 서서히 돌아왔다. 한 해녀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야, 인자 됐다, 됐다.” 얼마 뒤, 해녀들 옆에서 함께 울고 있었던 그에게 시가 찾아왔다.

“…숨을 놓는 동료에게 주문을 걸던 고래들이 생각났다/ 주둥이를 힘껏 물 위로 차올려 몇 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 가라앉은 삶을 떠받치며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 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 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됐다, 인자 됐다”(‘물의 말’ 부문)

 

20년 넘게 포항 구룡포 앞바다에 살면서 바닷가 사람들을 비롯해 ‘물것’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노래해 온 시인 권선희가 시편 ‘물의 말’을 비롯해 59편의 시를 묶은 신작 시집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창비)을 들고 돌아왔다. ‘구룡포로 간다’(애지), ‘꽃마차는 울며 간다’(애지)에 이은 세 번째 구룡포 연작시집.

시집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와,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갯것’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담배 물고 먹좆 꽂아 먹줄 튕기는 당당한 배 목수” 출신 정남씨(‘정남씨 연대기’), “목욕탕 구석 장판 깔린 간이침대가 일터”인 ‘화자씨’(‘첫눈’), “돌아가는 거는 참말로 디요”라고 한탄하면서 병든 영감의 마지막을 돕는 할머니(‘말년’), “부모 대신 업어 키운 동생 칼”에 맥없이 세상을 떠난 ‘만석씨’(‘웃는 사람’)….

시인 권선희가 20년 넘게 함께 울고 웃으며 지켜본 구룡포 ‘갯것’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는 왜 구룡포에 가야 했을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권 시인을 지난달 11일 경기도 가평의 카페 ‘그래도’에서 만났다.

―‘물의 말’에 나오는 춘자 형님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119가 와서 춘자 형님을 싣고 갔다. 폐에 물이 찼다고 하더라. 나중에 동료 해녀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형님을 병문안 가서 통박하곤 했다. 이제 물질하지 마라, 다음에는 죽어도 모른다, 고. 춘자 형님은 며칠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는데, 지금도 물질하러 꿈찔꿈찔 바다로 나오신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바닷가 부족’들은 다른 바다 생명들과 하나가 된다. ‘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는 바닷가 부족이나 그들의 삶을 고래로 은유한 시편. “빛나간 창끝에서 튀는 고래 살점에 숨이 터억 막혔다. 새끼 달고 도망치는 상처 난 고래 앞에서는 펄럭이는 마음 다잡는 깃발이었다. 길게 길게 짧게 길게 짧게 길게 뱃고동 울리며 밍크고래 한 놈 매달고 드는 뱃머리에 나부끼는 오색 대어 만선기였다.// 고래가 터지도록 술을 마셨다. 무당 굿판도 벌였다. 좀처럼 고요할 수 없는 생의 바다엔 상서로운 욕지기 만발하지만 더러는 노대바람처럼 명주바람처럼 고비마다 절창의 음절 타고 넘었다. 죽자고 살아낸 평생이 한 마리 고래였다.”(‘고래잡이는 고래로 돌아가고’ 부문)

 

―바닷가 사람을 한 마리 고래로 보는 시각이 놀랍다.

“고래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들려준 고래 이야기가 다가온다. 고래잡이들은 포경선 망루에 올라서 고래를 발견한 뒤 고래에 접근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를 쏴서 포가 고래에 꽂히면 그때부터 고래를 잡으려는 사람의 배와, 도망치려는 고래의 동선이 같아진다. 똑같이 파도를 넘으면서 고래가 힘이 빠질 때까지 따라간다. 고래가 가는 도중 새끼 고래가 여러 마리 붙는다. 어미 고래는 피를 흘리면서 계속 가고, 사람 역시 계속 어미 고래를 따라간다. 새끼 고래가 처지면, 어미 고래는 창끝처럼 생긴 지네에 새끼를 끼워 나아간다. 어미 고래에 새끼 고래가 붙어 있으니 그 고래를 잡으려는 사람 마음인들 안 상했겠나. 포경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는 말했다. 불쌍해도 우짜노, 내는 사람이고 지는 괴기인데. 포경선이 고래를 잡아 항구로 돌아오면서 만선 신호를 보내면 마을 사람들이 포구로 몰려온다. 배가 도착하면 동네는 잔치판이다. 정작 제일 신나야 할 할아버지는 소주 한두 잔 걸치고 집으로 들어간다. 어미 고래는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얹어갖고 가는데, 우리 집 둘째 놈은 애를 맡겨놓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사람이 고래만 같으면 자식 놈 놔두고 달아나는 놈 아무도 없을 것인디.”

춘천행 고속버스가 구불구불한 대관령 고개를 흔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버스에 탑승한 이래, 짝꿍이었던 친구는 통로 자리에 앉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친구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마치 죄인처럼 느껴져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친구는 또래들보다 독서 수준이 뛰어났다. 많은 책을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고, 글도 잘 써서 각종 백일장에 단골로 참가했다. 담임교사는 율곡백일장에 가기 싫었는지 외갓집이 강릉인 그에게 친구와 함께 대회가 열리는 강릉에 가라고 했다. 다만 결석 처리가 되지 않기 위해선 백일장에 접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접수한 그는 율곡백일장의 시 부문에 응모했다. 그런데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던 짝지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한 반면, 평소 독서나 글쓰기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그가 덜컥 입선을 해버렸다. 친구도 당혹스러웠을 것이고, 그 역시 놀라웠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대관령 고갯길에서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친구의 몸도, 그의 몸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쏠렸다. 그는 자신의 몸이 밀려서 친구의 몸에 부딪히는 게 미안하고 “황송했다”. 어느 늦봄, 고교 2학년생 권선희는 대관령 고개를 넘는 내내 자신의 몸이 친구에게 닿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속초에서 온 친구는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한 아이였다. 특히 속초 바닷가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바다의 어떤 이미지, 영상을 떠올렸다. 글을 좋아하는 친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어떤 눈이 생긴 것이었다. 시인 권선희의 원점이었다.

“당신도 대학 문창과를 나왔잖아? 일반부에 한 번 응모해 봐.” 어느 봄날, 포스코가 주최하는 샘물백일장이 열리는 포항 문예회관에서 남편이 갑자기 제안했다. 아들이 일기를 잘 쓴다며 학교에서 백일장에 나가라고 했고,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대회장에 나온 그였다. “만약에 상을 받으면 내가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서 쏠게.”

 

남편의 권유에 따라서 학생부 소속의 아들과 함께 백일장 일반부에 참여했다. 시를 창작해 냈는데, 일반부 장원을 차지했다. 얼마 뒤, 잡지 ‘포항문학’을 발간하는 동인모임 ‘푸른시’에서 참여를 권유했고, 한 차례 고사 끝에 가입했다. 곧이어 잡지에 실릴 시를 한 편 내 달라고 요청받았다. 1965년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선희는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꼭 거기를 들어가서 살아야 될까.” 남편이 맥주잔을 한 번 쭉 들이켠 뒤 물었다. 남편이 군무원이 되면서 군인 아파트를 나와 포항 민간 아파트로 이사한 그들이었다. “3년을 들어가서 살면 분명히 책 한 권을 줄 거야.” 그는 바닷가 구룡포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 발을 걸치는 것으론 안 된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 일원이 돼야 한다고.

남편은 구룡포로 근무지 변경을 신청했고, 곧 발령이 났다. 2000년 3월, 그는 가족과 함께 구룡포와 호미곶의 풍광이 바라보이는 곳에 짐을 풀었다. 그는 ‘중대장 각시’로 불리며 구룡포의 모든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물것’과 ‘갯것’이 그에게 파도처럼 쉴새 없이 몰려왔다. 7년 만인 2007년, 그는 첫 시집 ‘구룡포로 간다’를 발표했다. 다시 시집 ‘꽃마차는 울며 간다’를 발표했고,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 등도 출간했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시인까지가 시라고 생각한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시인의 역할도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를 문학이라는 장르에 얹어서 전달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글이 시여야 한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지난해 12월 구룡포를 떠나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했다. 구룡포에서 가져온 해국을 옮겨 심었다. 바람이 센 구룡포에선 보송보송하게 털을 키워 납작하게 옆으로 자란 해국은 바람이 세지 않아서인지 목이 위로 길어졌다. 지난 4월 건물 1층에 카페 ‘그래도’를 열었다.

시인 권선희는 오후 6시가 되면 가게를 닫고 집 다락으로 올라가서 휴식을 취한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밤 9시면 일찍 꿈나라를 찾는다.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물것’ ‘갯것’의 이야기를 전하는 샤먼을 만나기 위해서. 어느 순간, 삶이 진짜인지, 아니면 꿈이 진짜인지. 그리하여 샤먼이 온다.

“사람으로 살던 고양이와 뱀과 염소와 벌레들이/ 늑대를 숨기고 살던 사람과 새를 숨기고 살던 사람들이/ 불온한 숲이 불안한 강이 불길한 소원이/ 저마다 지은 악업과 선업을 바치는 시간이 있다//…사람과 신 사이 몸을 갈아타고/ 갈라진 손등 거역한 운명들 앞에 코트를 벗어놓고/ 들어간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샤먼을 기다리는 시간’ 부문)

 

권선희 시인은…

 

●1965년 춘천 출생 ●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잡지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 ●2000~2024년 11월 구룡포에서 생활 ●시집 ‘구룡포로 간다’, ‘꽃마차는 울며 간다’,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등 발표,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 등 출간 ●경기도 가평에서 카페 ‘그래도’ 운영


가평=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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