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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中 건국 75주년’ 현수막만… 조용한 홍콩 [심층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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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9-26 06:00:00 수정 : 2024-09-26 07: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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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관련한 질문하자 ‘묵묵부답’
“시위 가담자들 감옥행·해외 망명
더 이상 시위 일어날 동력 있겠나”
빠른 중국화에 반중 감정 깊지만
“10년 정도면 일국양제 종료” 체념

지난 22일 홍콩 센트럴 지역의 국제금융센터(IFC) 근처 도로. 비가 쏟아지자 행인들이 하나둘씩 우산을 펼쳐 들었다. 홍콩섬과 주룽(九龍)반도를 잇는 페리 선착장에서 IFC 쇼핑몰까지 이어지는 긴 육교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주말 시간을 보내던 수백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헬퍼)들 자리 옆에도 사이사이로 들이치는 비를 피하기 위한 우산이 펴졌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10년 전 이맘때도 우산이 홍콩 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그 의미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2014년 9월28일 시작된 우산혁명과 이후의 시위들에서 홍콩 시민들이 펼쳐 든 우산은 공안당국의 최루액을 막고 채증을 피하는 등 다양하게 쓰이며 시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날의 우산은 원래 용도 그대로 비를 피하는 데만 사용됐다.

 

달라진 우산의 의미처럼 체류 기간 동안 이질감이 느껴졌다. 수년 전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크게 늘었고, 쇼핑몰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지만 정작 개별 명품 매장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또 가는 곳마다 중국 건국 75주년을 축하한다는 붉은 현수막과 안내판이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길을 묻거나 인터뷰를 요청할 때 친절하게 답해주던 홍콩 시민들은 우산혁명과 관련된 질문에는 굳게 입을 닫는 모습을 보였다.

 

◆조용한, 그리고 앞으로도 조용할 홍콩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문제를 계기로 2014년 우산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을 맞았지만 홍콩에서는 이와 관련된 어떤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과 ‘홍콩판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2019년과 2020년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조용한 저항’이 이어졌다는 전언이 있었지만 올해 3월 국가안전수호조례가 시행에 들어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국가안전수호조례는 2020년 6월 중국이 직접 제정한 홍콩국가보안법을 보완하기 위해 홍콩기본법 23조를 바탕으로 홍콩 당국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날 만난 한 홍콩 교민은 2019년 시위 등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지금은 아예 이런 시위를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나 같은 외국인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중국 본토로 송환돼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며 “홍콩인 입장에서는 어떻겠냐”고 말했다.

지난 2019년 10월 20일 홍콩에서 일어난 시위에 참가한 시위대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우려는 기우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홍콩 법원은 지난 19일 추카이퐁에 대해 홍콩기본법 23조의 선동 혐의를 적용해 징역 14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지난 6월12일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는 문구가 쓰인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가다 경찰에 체포돼 홍콩판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징역형을 받은 사례가 됐다.

 

홍콩에서 나고 자란 30대 K씨는 이날 세계일보와 만나 “(시위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있거나 해외로 망명했고, 부자들은 재산을 싸 들고 외국으로 이민했는데 더 이상 시위가 일어날 동력이 있겠냐”고 말했다.

 

◆반중 감정 있지만 “곧 중국 될 것” 체념뿐

 

‘예의염치’(禮義廉恥)는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를 뜻하며 광둥어로는 ‘라이, 이, 림, 치’라고 읽는다. 홍콩에서는 여기에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를 뺀 ‘라이 이 림’(禮義廉)을 홍콩 내 친중 정당을 가리키는 멸칭(蔑稱)으로 부른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지난 22일 홍콩 주룽반도와 홍콩섬 등을 잇는 페리 선착장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함께 나부끼고 있다.

이 말을 K씨에게 전하니 그는 콧방귀를 뀌며 “그럼 그들에게 라이, 이, 림은 있다는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반중 정서가 읽히는 대목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면서 최소 2047년까지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고도의 자치권을 약속받았지만 빠르게 중국화하며 시민들의 반중 감정이 깊어지고 있다.

 

한 홍콩 시민은 “옛날에는 돈 많은 중국인이 홍콩에서 돈을 마구잡이로 쓰는 것을 보고 아니꼽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없다”며 “홍콩에서 소비를 많이 하지 않는 중국 본토 단체 관광객들만 늘어나 홍콩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몰려다니며 시끄럽게만 군다”고 토로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중국화가 가속화하면 애초 홍콩 반환을 결정하며 중국이 약속한 2047년보다 빠르게 일국양제가 종료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홍콩 공무원은 “향후 10년 정도면 일국양제는 사실상 종료돼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홍콩=글·사진 이우중 특파원 lo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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