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만약이란 없다고 하지만, 두산의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의 선발이 곽빈이 아니라 조던 발라조빅이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두산은 준플레이오프행 티켓을 이미 확정지을 수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미 1차전 결과를 알기에 할 수 있는 가정이자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는 가정이다. 그만큼 두산에겐 곽빈의 조기 강판이 뼈아프다. 이제 4위의 어드밴티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두산 이승엽 감독은 2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KBO리그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 KT와의 맞대결에서 선발 투수로 토종 에이스인 곽빈을 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곽빈은 올 시즌 30경기에 선발 등판해 15승9패 평균자책점 4.24를 기록했다.
15승은 삼성의 토종 에이스와 함께 리그 다승 1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다소 높지만, 상대를 KT로 한정지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곽빈은 올 시즌 KT전에 6경기 등판해 5승 평균자책점 1.51을 기록했다. 9개 구단 상대 성적 중 가장 좋았다. KT를 상대로 5승이나 거뒀기에 다승왕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터가 이러한데 곽빈을 1차전 선발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가을야구에는 정규시즌의 데이터는 그저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KT만 만나면 저승사자가 되어 KT 타자들을 돌려세웠던 곽빈이지만, 2일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선 아웃카운트 하나 잡기도 버거웠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김민혁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멜 로하스 주니어부터 장성우, 강백호, 오재일까지 네 타자 연속 안타를 얻어맞으며 아웃카운트 하나 없이 순식간에 석점을 내줬다.
처음 잡은 아웃카운트도 곽빈의 힘으로 잡은 게 아니었다. 무사 1,2루의 기회를 이어간 KT 벤치가 6번 타자 오윤석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했고, 오윤석은 절묘한 번트로 주자들의 한 베이스 진루를 이끌어냈다.
곽빈은 황재균과의 풀카운트 승부 끝에 한 가운데 들어오는 낙차 큰 커브로 루킹 삼진을 솎아내며 이날 경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여기에서라도 위기를 끝냈으면 좋았으련만, 후속 타자 배정대에게 중전 적시타를 얻어맞았다. 발이 느린 2루 주자 오재일의 홈 쇄도를 중견수 정수빈이 기가 막힌 홈 송구로 저격한 덕분에 길었던 1회를 넉점으로 막아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곽빈은 2회에도 마운드에 올랐지만, 선두타자 심우준을 볼넷으로 내보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승엽 감독과 두산 벤치는 곽빈을 마운드에서 내렸다. 이렇게 두산이 자랑하는 다승왕을 차지한 토종 에이스는 스타일을 제대로 구기며 어쩌면 올 시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가을야구 등판을 마쳤다.
곽빈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것은 발라조빅. 9월 이후 발라조빅은 19이닝을 던지며 15실점(14자책)으로 크게 부진했다. 9월 이후의 평균자책점이 무려 6.63에 달했다. 이 때문에 팀에 남은 유일한 외국인 투수임에도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 선발로 낙점될 수 없었다.
그러나 발라조빅의 이날 투구는 완벽했다.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직구 위주의 피칭에 슬라이더, 커브, 포크를 섞어던진 발라조빅은 5회까지 4이닝을 소화하며 단 피안타 1개만을 허용했다. 탈삼진은 6개나 잡아내며 KT 타선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9월 이후 난타당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발라조빅이 이날 선발이었다면 분명 경기 결과는 다를 수 있었다. 물론 팀 내 위상이나 상대팀과의 데이터 등을 두루 따져봤을 때 곽빈을 선발로 내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은 맞았다. 이래서 야구가 어렵다.
곽빈의 가을야구 부진은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다. 곽빈은 올 시즌 이전 포스트시즌 성적은 5경기 등판 2패 평균자책점 6.00(18이닝 13실점 12자책)이다. 두산은 올해 이전에 2021년, 2023년에도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렀는데, 1차전 선발을 모두 곽빈에게 맡긴 바 있다. 곽빈은 2021년 키움과읨 맞대결에선 4.2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지난해엔 NC와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선 3.2이닝 5실점으로 무너졌고, 결국 두산은 9-14로 패해 지난해 가을야구가 끝이났다. 곽빈은 큰 경기에 약한 ‘새가슴’이라는 오명을 이번에도 씻어내지 못한 셈이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1차전을 마친 뒤 ‘패장’ 이승엽 감독은 “1회 초반에 4점을 주면서 힘들게 시작했다. 곽빈이 난조를 보여 어려웠다. 이에 (상대 팀 선발) 윌리암 쿠에바스가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고 돌아봤다.
이날 두산은 곽빈이 조기강판하는 바람에 7명의 투수를 투입해야 했다. 3일 2차전마저 패하면 가을야구가 끝나는 만큼 두산과 이승엽 감독은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다. 4위라는 메리트는 1차전 패배로 사라졌다. 1차전에서 곽빈은 딱 36개의 공만 던졌다. 이승엽 감독은 “곽빈도 2차전에서 불펜에 대기한다. 곽빈은 물론 발라조빅도 상황에 따라 대기시킨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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