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至尊)은 ‘지극히 존귀하다’는 뜻이다. 왕조 시대에는 국왕의 존칭으로 쓰였다. 1335년 태어나 57세이던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워 임금에 오른 태조 이성계를 가리켜 “최고령에 지존이 된 인물”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선 지존이 ‘무술의 고수(高手)’를 의미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홍콩 느와르 영화가 한창 인기를 끌던 1989년 개봉한 유덕화, 알란 탐 주연의 ‘지존무상’(至尊無上)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오락물의 대명사가 된 오늘날에는 게임 잘 하는 사람을 일컬어 지존이라고 한다.
1994년 9월 온 국민을 충격과 공포 속에 몰아넣은 ‘지존파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와 교도소 등에서 만나 인연을 쌓아 온 20대 청년 6명이 김영삼(YS)정부 임기 첫 해인 1993년 4월 범죄조직을 결성한 것이 시초였다. 지존파라는 이름은 홍콩 영화 ‘지존무상’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당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대학 입시 비리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던 중 ‘부유층을 응징하자’고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행 대상 물색을 위해 무려 1200명이 넘는 서울 시내 백화점 고객 명단을 입수하기도 한 사실이 나중에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지존파 일당은 그들의 주거지 지하실에 범행 대상자를 가두기 위한 감옥과 시신 소각 시설까지 만들었다. 이른바 ‘살인 공장’이었다. 1993년 7월 연습 삼아서 여성 한 명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이들의 범행은 1994년 9월까지 1년 넘게 이어졌다. 수사 결과 희생자는 총 5명으로 밝혀졌다. 모두 지존파 일당에게 납치돼 감금됐다가 살해를 당했다. 시신을 절단한 뒤 소각해서 암매장한 그들의 수법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검거 후 일당은 방송사 취재진의 카메라를 향해 “돈 없다고 무시한 것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게 한(恨)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지존파가 그토록 증오한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29년 전인 1995년 11월2일 지존파 일당 6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이 강도살해 혐의로 유죄를 인정하고 원심의 사형 판결을 확정한 데 따른 것이다. 그날 지존파 일당을 비롯해 흉악범 총 19명이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YS 정부 들어 두 번째로 이뤄진 사형 집행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한 신문 보도를 보면 사형수 가운데 일부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안구, 콩팥 등 장기를 기증했다. 하지만 지존파 일당 중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수사와 재판 내내 “돈 많은 자를 저주한다”며 발악한 그들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을 돌리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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