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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영면에 든 ‘리틀 타이거’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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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1-12 06:46:44 수정 : 2024-11-12 06: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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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제국주의 시대에 아시아 국가로는 드물게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굴욕을 피했다. 이는 영국령 인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 덕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조건으로 독립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태국 역사가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군국주의 일본은 인접한 태국도 침략했다. 버마(현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공격을 위한 기지로 태국 영토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국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태국은 일본과 타협하는 길을 택한다. 그 때문에 오늘날 2차대전 역사를 다룬 기록물 중에는 태국을 ‘일본, 나치 독일 등 추축국 편에 선 국가’로 분류한 것도 있다.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 당시 태국군 참전용사 롯 아사나판(1922∼2023)의 유해 안장식이 열려 의장대가 고인의 영정과 유해를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태국은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를 두고 ‘2차대전 기간 불미스러운 일로 소원해진 미국·영국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결단’이란 시선도 없지 않다. 당시 태국으로선 국방력을 총동원했다. 연인원 6326명의 장병을 한국에 보냈는데 여기엔 육·해·공군이 모두 포함됐다. 태국은 6·25전쟁 당시 미국, 캐나다, 호주와 더불어 3군을 모두 파병한 4개국 중 하나다. 태국군의 용기와 실력은 1952년 가을 경기 연천 부근 폭찹고지(Pork Chop Hill)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훨씬 많은 숫자의 중공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고지를 사수했다. 3년이 넘는 전쟁 기간 태국군 참전용사 129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부상자도 1139명에 달했다.

 

2023년 11월 쏭윗 논팍디 당시 태국 국방총사령관(육군 대장)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은 논팍디 총사령관에게 “6·25전쟁 당시 ‘작은 호랑이’(리틀 타이거: Little Tiger)라 불리던 태국군의 용맹함과 희생을 잊지 않겠다”고 인사를 건넸다. 유난히 민첩하고 용감한 태국군 장병들이 미국 등 다른 참전국 용사들로부터 ‘작은 호랑이’란 별명을 얻은 점을 거론한 것이다. 이에 논팍디 총사령관은 “모든 참전국 군인의 희생을 기억하는 전쟁기념관에 방문해 영광”이라며 “국가안보와 국토 방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화답했다. 그는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 있는 태국 참전기념비에 헌화했다.

 

2023년 11월 쏭윗 논팍디 당시 태국 국방총사령관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태국 참전비에 헌화한 뒤 참전비를 둘러보고 있다. 전쟁기념사업회 제공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태국인 6·25 참전용사 롯 아사나판(1922∼2023)의 유해 안장식이 거행됐다. 고인은 1952년 11월부터 1년 가까이 한국에서 복무했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태국 정부로부터 ‘빅토리 메달’ 훈장을 받았다. 유엔기념공원에는 영국, 튀르키예, 네덜란드 등 여러 참전국 장병이 잠들어 있으나 태국 국적자가 영면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족은 고인을 더욱 영예롭게 기리고자 유엔기념공원 안장을 결심했다고 한다. 고인의 딸은 “이곳(부산)에 아버지를 안치하는 것은 그의 기억을 기리는 것과 동시에 한국의 평화를 위해 싸운 태국 군인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우리 국민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의 희생이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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