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국가로 성장하며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부상했던 일본은 대공황 이후 내부 문제를 외부 팽창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미국과 충돌하였다.
그 시작은 1931년 만주사변이었다. 관동군이 조작한 음모와 독단적 행동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만주를 장악하고 만주국을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관동군의 월권을 묵인했고, 일본 내 여론은 이를 지지하며 명령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군내 하극상 풍조를 낳았다. 이어 2·26사건과 같은 친위쿠데타가 발생했고,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일본 정치와 사회는 군국주의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만주사변은 성공으로 보였으나, 일본의 국제적 고립과 중국 내 반일주의와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일본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또다시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기대했던 속전속결은 실패했고 중국의 결사 항전과 광활한 영토는 전쟁을 장기화하게 하였으며 일본은 전쟁의 늪에 빠져버렸다.
1930년대 후반 유럽 정세의 급변은 일본에 새로운 낙관론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일본은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이 고립되는 것을 목격했다. 일본은 이 틈을 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출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모스크바 직전까지 진격하자 독일의 승리가 아시아 내 일본의 패권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다. “달리는 말에 올라타라”라는 구호는 당시 일본 내 호전적 분위기를 상징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 정세 안에서 일본에 의해 아시아 내 핵심 이익을 위협받게 된 미국은 대일 석유 금수와 경제 봉쇄로 일본의 팽창을 제재했다. 1941년 11월 말, 미국은 헐(Hull) 노트를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만주사변 이전의 영토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군부는 이를 항복 강요로 간주했고, 미국과의 협상 대신 전쟁을 선택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뜨렸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끔 만들었다. 태평양전쟁 초반에는 일본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으나, 미국의 압도적 국력을 바탕으로 한 반격에 점차 무너졌다.
만성적 자원 부족, 국제적 고립, 군국주의적 정치 및 사회구조, 독일의 승리에 대한 과도한 낙관, 미국의 전쟁 의지에 대한 오판은 일본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끌었다. 일본은 생존과 아시아에서의 ‘자존지위’를 확보하려 했지만, 국제 질서를 거스르는 침략과 전쟁은 스스로를 파멸시켰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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