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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가지 향기로 빚어낸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입력 : 2024-12-23 20:40:47 수정 : 2024-12-23 20: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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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아-오도라마 시티’ 귀국 보고전

장독대·밥 짓는 냄새·함박꽃향·수산시장 등
향기로 추억과 기억 담아내는 특별한 전시물

600여개 이야기와 얽어 ‘삶냄새’ 물씬 나게 해
작가, 향 외에도 소리·빛 등도 시각예술로 승화

“흡흡 … 흡흡흡 … 흡흡 …”

관람객들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전시장에 매달린 뫼비우스띠 모양의 작품을 올려다보며 연신 냄새를 맡고 있다. 무슨 향기를 내뿜고 있는지 가려내기 위해서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전시장에 매달린 뫼비우스띠 모양의 작품을 올려다보는 관람객이 냄새를 맡고 있다. 햇빛, 안개, 밤공기, 장독대, 짠 내, 수산시장, 공중목욕탕, 도시 냄새 등 17가지 향기가 묻어나지만 대부분 서너 가지만 알아차린다.

햇빛과 안개, 밤공기의 냄새, 장독대, 장작, 밥 짓는 냄새, 함박꽃향, 짠 내, 도시의 냄새, 할머니·할아버지 집 냄새, 수산시장, 공중목욕탕, 그리고 오래된 전자제품에서 나는 냄새 ….

17가지 향기가 배치되어 있지만 대부분 서너 가지만을 알아차리는 데 그친다.

올해 4~11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장식한 ‘향기’가 서울로 옮겨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제60회 국제미술전 한국관에서 선보인 ‘구정아 - 오도라마 시티’의 귀국보고전을 내년 3월23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제1, 2 전시실 전관에서 개최한다.

현지 한국관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구정아 작가가 참여하고 이설희(덴마크 쿤스트할 오르후스 수석큐레이터), 야콥 파브리시우스(덴마크 아트허브 코펜하겐 관장) 공동 예술감독이 기획했다. ‘오도라마’는 향기를 뜻하는 ‘Odor(오도어)’에 ‘drama(드라마)’를 결합한 단어다.

 

야콥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은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베네치아에서는 이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간직한 향기 이야기이므로, 여기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향기에 관한 추억은 무엇인가요?”

지난 6월25일부터 9월30일까지 베네치아 오픈콜에서 전 세계 사람들은 한국의 향을 체득했다. 비엔날레팀은 소셜미디어, 광고 등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남북한 사람, 비한국인 등 한반도와 연을 가진 익명의 수많은 사람에게 ‘한국(코리아)의 도시, 고향에 얽힌 향의 기억’을 물었다. 이를 통해 600여 편의 향기에 관한 기억과 추억을 모을 수 있었다. 16명의 조향사들이 작가와 함께 선별된 사연과 키워드를 바탕으로 17개 향을 개발했다.

햇빛 냄새의 경우 오래된 한옥, 호박잎, 쌀, 철쭉과 살구꽃, 시골길의 바람 냄새를 버무려 해가 중천에 떠 있고 농지의 호박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점심시간이 갓 지난 햇살의 냄새를 구현해냈다. 서울의 향기는 골목과 음식 냄새, 군중 내음, 기름과 쇠, 땀 내음, 매연과 자동차 등 단순하지 않은 향의 조합을 통해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을 표현해냈다. 오래된 전자제품은 컨테이너, 낡은 소파 덮개, 금속, 젖은 점토, 제철소와 흙먼지 냄새에 화학 섬유공장 냄새를 더해 추억 속에 존재하는 바로 그 냄새를 끄집어냈다.

야콥 파브리시우스 예술감독은 “이번 귀국보고전이 현지 전시와 다른 점은 스토리텔링에 집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베네치아에서는 이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면서 “우선 내세울 사항은 사람들이 간직한 향기 이야기이므로, 여기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설명했다.

 

제1전시실은 600여 개 이야기를 담은 120개 배너가 차지하고 있다. 배너에는 향기 메모리를 공유한 이들의 이름, 출생 연도, 출생 지역과 함께 향기를 맡았던 장소와 시기가 적혀 있다. 관람객들은 커다란 배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세세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바닷가 시골마을 뙤약볕 아래 말라가던 굴껍질의 짠 내 섞인 비린내. 지금은 통영이 관광도시가 되어 … ’/ ‘새벽 세네시, 이태원 클럽 모퉁이 근처 식당의 만두 찜기에서 어둡고 짙은 공기와 함께 피어오른 흰 수증기.’/ ‘큰외삼촌의 한약방 냄새와 시골의 풀냄새가 섞인 … 어렸을 때는 한약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커서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고요해진다.’/ ‘어릴적 할머니를 따라간 방앗간에서 깨가 채유기를 거쳐 걸쭉한 기름으로 나오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 고소한 기름의 향은 현재 시간에 진하게 남아 … 한국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강렬한 향이겠죠?’/ ‘여름밤 부모님께서 에프킬라 모기약을 뿌리신 뒤 방문과 창을 다 닫고 밖으로 … 기다리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했어요. 그때의 모기향 냄새도 생생 …’

제1전시실은 600여 개 이야기를 국문과 영문으로 담은 120개 배너가 차지하고 있다. 배너에는 기억과 추억을 공유한 이들의 이름, 출생 연도, 출생 지역과 함께 향기를 맡았던 장소와 시기가 적혀 있다. 서울, 인천, 충주, 수원, 여수, 마산, 밀양, 부산, 그리고 북한 등 한반도 곳곳의 저마다 다른 향기 메모리다. 관람객들은 커다란 배너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삶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구정아는 지난 30년 동안 ‘향’에 애착을 보였다. ‘향’은 활동 초창기인 1996년 파리 스튜디오의 작은 옷장에 좀약을 배치한 냄새 설치작품 ‘스웨터의 옷장’ 이래, 자신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시킨 핵심 소재다. 이후 도쿄 모리미술관(2003), 카지노 룩셈부르크 미술관(2005), 뉴욕 디아 파운데이션(2010), 런던 채링 크로스 역의 사용 중지된 주빌리 라인 승강장(2016), 지겐 현대미술관(2022) 등의 전시를 거치면서 냄새 경험의 규모를 확장해 왔다.

세계적인 작가 구정아에게는 ‘모든 곳에서 살고 일하는’(lives and works everywhere)이란 수식어가 앞에 붙는다. 건축, 언어, 드로잉, 그림, 조각, 애니메이션, 영상, 사운드, 향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해 세상의 다양한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려 왔다. PKM갤러리 제공

구정아는 ‘모든 곳에서 살고 일하는’(lives and works everywhere) 작가다. 그간 그는 건축, 언어, 드로잉, 그림, 조각, 애니메이션, 영상, 사운드, 향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해 세상의 다양한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려 왔다. 특히 향, 빛, 온도, 사운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를 시각예술의 재료로 끌어오고, 소소하고 내밀한 경험과 대규모 몰입형 작품을 융합해 일상의 시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사물과 풍경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재배열’해 인간과 자연, 언어와 과학, 감각과 논리를 시적으로 승화한다.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2012), 디아파운데이션 및 디아비콘(2010), 파리 퐁피두센터(2004)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베네치아비엔날레(2014, 2009, 2003, 2001, 1995), 리버풀비엔날레(2010), 광주비엔날레(2020, 2014, 2002, 1997)와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2010, 2004, 2002), 루이뷔통 파운데이션(2015), 국립현대미술관(2015) 등의 유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2년 휴고보스상 최종 후보, 2005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 2016년 주영한국문화원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글·사진=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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