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침공 겪은 아픔 영향 주저없이 참전
황실 근위대 중심으로 정예 병력 편성
자국 공산화 이후에 모진 핍박 받기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다. 전투병을 파견한 16개국은 미국 등 서방국이 대부분이었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도 한국을 돕고자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이들은 6·25 전쟁에서 253전 253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강뉴(칵뉴·Kagnew)부대란 이름을 붙였다. 강뉴는 에티오피아어(암하라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격파하다’라는 뜻이다. 셀라시에는 출정식에서 장병들에게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라고 명했다.
셀라시에가 한국에 파병을 한 것은 에티오피아가 겪은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아 국토를 점령당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941년 수단에서 결성된 에티오피아 망명군이 영국군과 함께 이탈리아군을 몰아냈다.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 역사를 통해 국제사회 집단안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한다.
1951년 5월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에 배속, 같은 해 9월 강원 화천군 적근산 전투에 참여했다. 1952년 10월 철의 삼각지 공방전에서 단 한 차례도 고지를 내주지 않았다. 1953년 7월 정전 때까지 연인원 3518명(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037명)이 참전해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으나 포로는 없었다. 에티오피아 군인들은 부상한 동료를 포기하지 않았고, 전사한 동료의 시신도 진지로 옮겨왔다. 동료가 적에 붙잡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했다. 부산 유엔군 묘역에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없는 이유다.
용맹하게 싸운 에티오피아 군인 중에선 한국에도 알려진 인물이 있다. 국가보훈부는 2017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강뉴부대원이던 구르무 담보바 이병을 선정한 바 있다. 담보바 이병은 1951년 참전해서 강원 화천군과 철원군 일대에서 공을 세웠다.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어 귀국했지만 다시 참전했다. 당시 강뉴부대에는 담보바만큼 무반동총을 잘 다루는 병사가 없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와 혹한의 고통을 또 겪어야 하는 것이 두려웠지만 두 번째 파병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강뉴부대는 1956년까지 주둔하며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에티오피아에서 1974년 공산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셀라시에 황제는 폐위됐고, 전쟁영웅으로 칭송받던 참전용사들은 동맹군(공산군)과 싸운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6·25 참전으로 받은 훈장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1년 공산 정권 붕괴로 양국 외교 관계가 복원돼 2000년대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 ‘따뜻한 하루’ 등 비정부기구(NGO), 기업이 에티오피아에 의료시설·학교·복지회관 등을 짓고 참전용사와 후손을 돕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