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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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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1-10 00:02:39 수정 : 2025-01-10 00: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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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변고에 당황하다가
예상못한 선의와 친절에 감사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꿀 때
선물 같은 일상 주어질테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선물’(‘무엇이든 가능하다’에 수록,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오늘 임원들과의 회의가 길어져서 에이블은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회사 첫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먼 데서 온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모두가 회의실을 떠날 때 잠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다정한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사실 참석자들은 그녀가 말을 계속하자 책임자인 에이블에게 회의를 그만 마쳐 달라는 신호를 보냈었는데.

조경란 소설가

집에 도착하자 허기와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에이블은 잠시 쉴 틈도 없이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역할을 시작해야 했다. 아내, 딸, 손주들이 마을 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을 보러 갈 준비를 다 한 상태였고, 특히 손녀 소피아는 ‘스노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애착 인형인 플라스틱 조랑말이 아직 한 번도 연극을 본 적이 없다며 들떠 있었다. 막이 오르고 불빛이 어둑해지자 꼬리에 밝은 분홍색 털이 달린 인형을 꼭 붙잡은 손녀 옆에 앉은 에이블에게 어떠한 생각이 덮치듯 휙 내려왔다.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고 있을 중년의 동생, 너무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스테이크 조각에 기쁨을 느끼던 순간들.

무대에서는 유령에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외로운 아이”라는 말을 들은 스크루지가 울고 있었다. 며칠 전 신문에 그 배우에 관한 기사가 났는데 아내와 에이블은 그 혹평이 불필요할 만큼 잔인하다는 데 동의했다. 배우도 그 기사를 읽었을 텐데. 오늘따라 우스꽝스럽고 대사에도 호소력이 없어 보였다. 에이블은 지금 나란히 앉은 가족들, 이제 누리게 된 부와 안전함에 기분 좋은 고단함을 느꼈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꺼져버렸다. 무대는 암흑에 빠졌다. 사람들은 동요했고 애들은 울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무대를 빠져나가느라 혼잡해졌다. 무대에 있던 누군가가 침착하라고 외치는 순간 다시 불이 들어왔다.

집에 와 어른들의 대화를 들은 손주들이 물었다. 왜 조명이 나간 건지, 변고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인생에는 뭔가 일이 잘못되거나 흠이 생길 때가 있다고 에이블은 대답했다. 공연도 재개되어 무사히 끝났고 가족 모두 따뜻한 집에서 잘 준비를 하는데, 소피아가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손녀의 애착 인형이 없어졌고 누군가 다시 극장에 가서 찾아봐야 했다.

극장에는 스크루지 역을 맡았던 배우가 남아 있었는데, 그에게 순순히 그 조랑말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배우는 그를 작고 네모난 방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걸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뒤에는 조랑말을 줄 테니 여길 떠나면 된다고. 에이블의 마음에 무언가가 깃들었다. 이런 식으로 타인과 게다가 냉소했던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아 본 적은 없었는데. 뜻밖에 에이블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배우에게 했고, 배우도 그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처음엔 편견과 냉소적인 시선을 주고받았던 마을 사람들이.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배우는 에이블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가슴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듯한데도 에이블은 그 말을 들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가 생긴 것도 좋았다. 아까 회의에 참석하느라 먼 곳에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지나칠 만큼 많이 해 온 참석자도 생각났다. 사람들은 외롭고 다정한 말을 기다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에이블은 오늘 밤 그 점을 온전히 깨달았다.

이 단편에는 세 가지 선물이 보인다. 극장에서 되찾아 손녀에게 전해 줄 애착 인형, “진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멋진 시간”, 그리고 고단했던 하루 끝에 듣게 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말. 하루 동안에는 크고 작은 변고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나는 선의와 친절도 있다. 서로가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려고 할 때, 냉소에서 호의로 시선을 바꿀 때, 서로 지극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그런 틈에.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더 자주 듣고 할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나날들도 관대한 선물처럼 주어진 것일 테니.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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