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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을 향한 작은 헌사

입력 : 2025-01-09 18:01:40 수정 : 2025-01-09 18: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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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계에서 꿈꾸기/ 이정현 지음/ 도서출판b / 1만8000원

 

2025년 1월 한국인은 내전에 가까운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총칼은 없지만 한국 사회의 대립 구도는 명확해지고 있다.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식을 기다리며 자긍심을 가졌던 시절은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12·3 비상계엄’ 선포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시·사변 상황이 아님에도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계엄 관련 절차도 무시했다. 여의도에 군인들을 출동시키고, 정치인 체포를 시도하는 등 국회의원들의 의결을 강제로 막았다. 국민이 선출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은 시민 보호 아래 가까스로 담을 넘어야만 했고, 계엄 해제 전까지 대다수 국민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이를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정치적 야만은 국회의 계엄 해제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내전은 장기화할 조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헌법과 반헌법’의 구도 대신 본질과 무관한 ‘여야 대립’에 함몰된 이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법원이 적법하게 발부한 체포영장마저 거부하면서 법치주의를 스스로 훼손하는 한편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 국제분쟁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GC)은 ‘올해 주목해야 할 10대 분쟁지’로 한반도를 포함했다.

이정현 지음/ 도서출판b / 1만8000원
 

정치적 혼란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개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정현 문학평론가는 최근 발간한 저서 ‘무너진 세계에서 꿈꾸기’를 통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내던져진 개인들의 선택을 조명한다. 물리적 전쟁이 아니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의성을 갖는다. 이 책에는 기꺼이 양심을 버리고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자들,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들, 자신들의 과오를 끝내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자들이 나온다. 한편으로는 망가진 세계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도 조명된다. 저자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라 불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냉전 등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이들의 삶은 돌아보고, 이들이 살아온 궤적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탐구한다.

 

저자는 전쟁이란 파국에서 ‘무너진 자들’부터 톺아본다. 가령 히틀러의 대변인인 요제프 괴벨스의 삶을 통해 대중이 선동당하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저자가 본 괴벨스의 선전술 원칙은 명료하다. 괴벨스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는다”고 본다. 괴벨스는 메시지를 가장 단순하게 가공하고 이것을 끝없이 반복했다. “선동은 문장 하나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해명보다 선동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는 괴벨스의 선전술이 오늘날 정부와 언론에 활용되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챕터인 ‘통과한 자들’에는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을 탈출해 “왜 우리는 히틀러를 막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한 에리히 프롬과 같은 망명자들, 풍자와 웃음으로 나치의 광기를 전복시켰던 찰리 채플린 등이 거론된다.

 

저자는 ‘누락된 자들’을 통해 중국 작가 하진의 ‘전쟁쓰레기’, 태평양 전쟁 최후의 일본군 ‘오노다 히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개선문’ 등 문학작품과 실존 인물을 넘나들며 폭력적인 국가와 전체주의 체제, 그 속에서 부품으로 전락한 개인들의 희생과 슬픔 등을 다룬다.

 

끝으로 ‘꿈꾸는 자들’에서는 상부의 반대에도 배고픈 독일 아이들에게 “과자를 잔뜩 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사탕 폭격기’를 몰았던 27세 미군 조종사 게일 할보르센의 이야기,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반대하며 행동하는 양심으로 세상을 살다 간 ‘영원한 청년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의 삶이 실렸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라고 밝힌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극단의 시대는 인간 사이의 믿음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책이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을 향한 작은 헌사’라고 밝힌다. 이어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한과의 긴장 등 물리적인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더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전해준다. 내란 우두머리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총으로 무장한 채 반헌법적 지시를 추종한 고위 군·경찰 간부가 ‘망기진 자들’에 가깝다면 계엄 발령 소식에 국회에 맨손으로 출동한 시민들의 모습은 ‘꿈꾸는 자들’이다. 총 61개의 에피소드는 길지 않은 만큼 술술 읽힌다. 각종 문학작품이 소개되고 있어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지적 여행을 떠나기에도 좋다.


세종=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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