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정 작가
‘길냥이’ 소재 현실 속 시선 표현
날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 보여줘
이희은 작가
현실·가상 시각 교차 지점 탐구
분해 등 거쳐 창조적 화면 연출
정지아 작가
사람 얼굴에 드러난 감정 등 그려
현재적인 감각 담은 자화상 선봬
조현정·이희은·정지아 3인 기획전이 ‘Untitled: 엇갈리는 지점들’이란 문패를 내걸고, 2월15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미술경영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 제목의 ‘엇갈리는 지점들’이란 단지 지리적 위치나 물리적 공간이 아닌, 작가들의 ‘서로 다른 사유와 해석 혹은 표현’을 뜻한다. 각자의 독창성과 시각으로 동시대적 관심사를 풀어내는 변별력이 곧 ‘엇갈리는 지점’인 셈이다. ‘Untitled(무제)’ 역시 신진작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특정적으로 정의 내린다는 것은 마침이자 멈춤이다. 단어 그 자체로 무한한 가능성과 열린 해석의 여지를 내포한 ‘Untitled’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을 빈 여백이자 시작점이다.
◆조현정 작가
어느 장면이건 멋지고 예쁘게 꾸미거나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과 또 다른 내일…, 언제든지 만나게 될 일상의 날 것 그대로를 존중하고 있다. 아무리 원대한 삶의 모습일지라도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볼품없이 해진 담벼락이나 나뒹구는 기물들이 등장하더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을 지닌 식물들이 꼭 함께 자리한다. 특히 각각의 구역을 담당한 주인공 고양이의 존재감은 아직 ‘살 만한 세상’임을 반증하고 있다.
작가 조현정은 ‘꾸밈없는 일상의 시선과 교감’을 그림으로 펼쳐낸다. 그 교감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길냥이’다. 그림 속 제각각의 고양이는 실제로 작업실 주변이나 일상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다. 작품에는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싶은지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듬어지지 않고 꾸며지지도 않았지만, 분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야 만다. 꽃들이 머금은 빛과 생동감 넘치는 색채, 하나하나의 잎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유려한 선들은 살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저 투박한 장면들이 오히려 본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스쳐 간 일상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흡입력을 지녔다. 과연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새로운 물음을 갖게 해준다.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을 붙잡아내는데, 주로 자연물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한다. 유화로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동감 있고 풍부한 색채에 집중하면서,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시간별 느낌을 살려내고자 세밀한 관찰을 통해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 속 고양이는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상징적 요소로 존재하며 그림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희은 작가
한국만큼 디지털 기반이 견고하고 체계적인 나라는 드물다. 게임은 그 디지털 문화를 대표하는 장르다. 10대나 20대에겐 디지털 매체가 제공하는, 무수한 이미지들로 구성된 가상 세계가 더 실감 나고 현실적으로 느껴질 법하다. 그곳에는 물리적, 경제적 한계를 벗어난 무한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환상적이면서 웅장한 게임 속 사회에선 언제나 내가 주인공 또는 창조자가 될 수 있다.
작가 이희은이 탐구하는 영역은 ‘현실과 가상 세계의 시각적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꿈처럼 모호하고, 어느 이야기 속 한 장면 같은 이미지’는 바로 디지털 세대가 경험한 ‘현실과 가상 사이의 흐릿한 순간들’이기도 하다. 데자뷔처럼 몽환적인 이희은의 풍경들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또 다른 사회를 형성해내고 있다. 현실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가상 세계에 또 다른 현실을 구현하려는 창조적 시도이다.
작가는 가상 세계에서 느끼는 시각적 경험과 감각의 혼란을 다룬다. 특히 게임 속 강렬한 허구적 경험이 내면에 남기는 ‘소화되지 않은 잔상’에 주목한다. 이것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과잉과 혼란을 포착해내 초현실적인 시각 언어로 풀어낸다. 가상세계에서의 경험은 반복되는 분해와 재조합을 거쳐 새로이 짜인 화면을 연출한다.
◆정지아 작가
정지아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감정들이나 상황과 반대되는 모순된 표정들을 그려낸다. 공필화(한국 전통의 세밀화)를 현대적 감각의 기법으로 되살린 자화상 시리즈를 선보인다. 수려한 여인의 초상 시리즈는 자전적 고백을 담은 듯 청초미를 발산한다.
동양화에서 여인의 삶을 자연에 비유할 때, 20대 초반은 가장 싱그러운 생명력이 돋보이는 이른 봄이다. 여리고 섬세한 감각과 감성으로 세상을 처음 마주한 여인, 아직은 소녀의 모습을 품은 채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지아의 그림 역시 거의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희로애락의 감정선을 숨기지 못해, 풋풋함과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제아무리 찬란한 젊음이라도 삶에 대한 나름의 고통과 슬픔, 실망과 기대, 애증과 그리움의 깊이는 어른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선 삶에 대한 첫 시선의 가장 솔직한 감성을 만나볼 수 있다.
“얼굴에는 순간의 감정뿐만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데… 난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표정 읽기를 즐겼다. … 내면의 사랑, 욕망, 불안같이 순간순간 변하는 감정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싶다.”
작가의 고백처럼, 자화상 같은 여인초상들엔 절제된 다양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 정면 혹은 어느 먼 곳을 응시한 시선은 혼란스러운 지금의 감정보다, 모든 것이 가라앉아 안정된 내면의 모습에 닿아 있다. 이는 한참을 살았어도 아직 잘 모르는 우리 인생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것 같아, 볼수록 관람객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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