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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법리 투쟁만 일삼는 정부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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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1-20 23:56:17 수정 : 2025-01-20 23: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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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빼고서 접으세요(유모차)’, ‘토너를 마시면 안 됩니다’, ‘이 옷을 입고 날려고 하지 마세요(슈퍼맨 코스튬)’

미국 상품에 붙어 있는 경고문들이다. 하나같이 ‘잉크 낭비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 같은 황당한 경고문은 매해 늘어날지언정 줄어들지 않는다. ‘소송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법적 분쟁이 빈번한 미국에선 이 같은 노력이 오히려 싸게 먹히는 까닭이다. 2021년 기준 미국의 법률 시장 규모는 약 500조원으로 한국(7조7051억원)의 65배에 달한다.

채명준 산업부 기자

우리나라도 미국을 따라가는 모양새다. 다만 법리 투쟁의 주체 다수가 ‘정부’라는 게 눈에 띈다.

지난해 179명의 생명을 앗아간 제주항공 참사의 원인으로 무안국제공항 내 콘크리트 둔덕이 지목됐고, 국내외 전문가들도 규정 위반이라 지적하고 나서자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안전성 확보 미흡은 인정하지만 규정 위반은 아니다’고 대응했다.

규정상 종단안전구역 내 시설물은 충돌 시 항공기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러지기 쉬운 재질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방위각제공시설(로컬라이저 등)이 제공되는 지점까지 활주로 종단안전구역을 연장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까지’가 로컬라이저 포함이 아닌 ‘그 이전까지’로 봐야 하므로 규정 위반이 아니란 것이 국토부의 논리였다. 하지만 오버런(활주로 이탈) 시 항공기가 먼 거리를 미끄러질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토부의 주장은 ‘당연함’과는 동떨어진 법리 투쟁으로 비친다.

어디 국토부뿐이겠는가. 이미 이번 정권 초기부터 ‘당연한’ 일들은 무시되고 줄곧 법리 투쟁만 이어졌다. 기획재정부의 경우 예산과 관련해 당연히 소통해야 할 국회를 패싱하고 한국은행으로부터 2년 연속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117조원, 173조원)을 빌리고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심지어 법적으로 명시된 지방교부세마저 국회 동의 없이 삭감한 뒤 합법이라 주장하고 나서 일부 지자체가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총 159명의 희생자가 나온 이태원 참사에서도 ‘법’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과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법리만을 다투며 끝끝내 자리를 지켰다. 최근에는 행정부의 수반인 윤석열 대통령까지 총칼로 국회를 침탈한 비상계엄이 정당한 통치행위라며 법리를 다투고 있다. 이곳에 국민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공직자로서의 ‘당연함’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법리만을 내세우는 정부는 필연적으로 국민을 사회적 갈등과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내몰게 된다. 어떻게든 보상금을 타내려는 이른바 ‘진상 고객’처럼 구는 정부를 국민이 신뢰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상세한 규정과 법을 만드는 게 답일까. 미국의 진상 고객은 법률 시장 활성화했다는 일부 긍정적 측면이라도 있지만 정부의 법리 투쟁은 한국 사회에 대체 어떤 이익을 가져올 수 있을까.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국민의 대표인 정부가 간신히 낙제점을 넘기는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채명준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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