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의 구조조정,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 50대 김모씨는 시중 5대 은행 중 하나인 모 은행에서 25년간 근무한 ‘베테랑’ 직원이다. 하지만 올해 초, 이 은행은 대규모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점포 수가 감소하고, 업무 프로세스가 자동화되면서 인력 축소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고민 끝에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그는 “은행 업무의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나의 역할도 점점 축소되는 것을 느꼈다”며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기 위해 희망퇴직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번 희망퇴직에는 김씨처럼 장기 근속자뿐만 아니라 비교적 젊은 직원들도 다수 참여했다.
올해 시중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2000명이 넘는 인원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디지털 전환에 따른 점포 축소와 생산성 효율화 움직임 속에서 은행권의 구조조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5대 은행의 희망퇴직 규모는 전년 대비 증가해 2000명을 넘어섰다. 은행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결과 647명이 이달 17일 자로 회사를 떠났다. 이는 전년(674명)과 유사한 수준이나, 타 은행과 비교해 가장 큰 규모다. KB국민은행은 신청자 기준을 1972년생에서 1974년생까지 확대했고, 특별퇴직금도 30개월에서 31개월로 늘리며 참여를 독려했다.
신한은행은 올해 희망퇴직자 수가 541명으로 확정되며 전년(234명)의 두 배를 넘어섰다. 대상 연령을 1986년생까지 확대하며 젊은 직원들의 참여를 유도한 결과로 풀이된다.
우리은행은 이달 2일부터 7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결과 약 500명이 퇴직을 결정했다. 이는 전년 대비 크게 증가한 수치로, 2024년까지 362명이 회사를 떠날 예정이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12월 31일 자로 391명이 퇴직해 전년(372명)보다 소폭 증가했다. 대상은 10년 이상 근무한 40~56세 직원으로, 퇴직금은 최대 28개월 치가 지급됐다.
하나은행은 이달 2일부터 6일까지 준정년 특별퇴직 신청을 받았으며, 이달 31일 자로 퇴직이 예정되어 있다. 구체적인 인원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난해에는 339명, 올해는 325명이 퇴직했다.
은행권은 디지털 전환과 비대면 금융 서비스 확산에 따라 점포 축소를 가속화하고 있다. 모바일 뱅킹의 보편화로 인해 고비용의 영업점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신규 채용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기존 인력을 줄이는 조치가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취약계층에 대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고령화가 심한 지역에서는 은행 점포 접근성이 현저히 낮아져 금융 소외 문제가 심화될 우려가 있다. 대도시에서는 은행 점포까지의 이동 거리가 평균 1km를 넘지 않지만, 경북·전남 등 일부 지역에서는 최대 27k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권은 희망퇴직을 유도하기 위해 타 업종 대비 높은 수준의 보상 패키지를 제공하고 있다. 기본급이 아닌 월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36~39개월 치의 퇴직금을 지급하며, 자녀 학자금, 재취업 지원금, 의료비 등도 추가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 덕분에 40대에 퇴직 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은행들이 희망퇴직금을 넉넉히 지급할 수 있는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고금리 장기화로 인한 사상 최대 실적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퇴직금 잔치"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자 수익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시중은행들이 지나치게 높은 퇴직금을 지급하는 것은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며, "수익의 사회 환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은행권은 효율화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으며,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금융취약계층을 배려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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