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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어떤 손을 가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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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1-21 23:10:29 수정 : 2025-01-21 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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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일이다. 나는 저녁에 있을 소규모 강의를 위해 지하철로 이동 중이었다. 겨울이라 일찍 해가 져 한강 다리 조명과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의 붉은 후미등이 선명했다. 지하터널로 진입하면서 객실의 거대한 유리창이 새까매졌다. 옹졸한 모양새로 입술을 오그린 얼굴이 유리에 비쳐 나는 얼른 눈을 돌렸다.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따라 유리에 비친 어두운 얼굴들이 전부 다 내 것 같았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쥔 채 허공에 매달리듯 서서 졸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자꾸 사과하는 사람이, 거북목을 하고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이상하리만큼 친숙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용히 웃고 있는 앞 좌석 사람에게 시선이 머문 것은.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십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앞머리가 가지런하고 코와 턱이 둥글었다.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조금도 두리번대지 않고, 웃음이 번진 얼굴로 간혹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퇴근길 지하철과 영 무관해 보였다. 좋아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새까만 정수리를,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화면이 유리창에 그대로 비쳤다. 잔뜩 경계하며 풀숲에 몸을 숨긴 잿빛 고양이에게 누군가 참치 캔을 내미는 영상이었다. 고양이는 오래지 않아 경계를 풀고 화면 아래쪽에 커다랗게 찍힌 누군가의 손 쪽으로 다가왔다. 고양이가 캔을 할짝대려는 순간 손이 빠르게 움직여 고양이 얼굴을 후려쳤다. 뭐라고? 나는 소리 없이 경악한 채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영상은 친절하게도 고양이 얼굴 쪽을 클로즈업해 그 장면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혼비백산한 고양이가 풀숲으로 도망칠 때까지 영상은 집요하게 고양이를 쫓았다. 그리고 화면을 보고 있던 그가, 영상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풀숲에서 고양이가 나왔고, 손이 움직였고, 그가 다시금 고요히 키득거렸다.

강의실에 도착해서도 나는 머릿속이 멍한 채였다. 있잖아요, 내가 지금 오다가 뭘 봤냐면요. 나는 마치 일러바치듯 수강생들에게 방금 본 장면을 설명했다. 그들이 낮게 탄식하며 내 황망함에 공감해주었다. 동물 학대 영상이 무분별하게 퍼지고 있는 현실을 그들과 함께 지탄하면서 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이상했다.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뿐인데, 내 세계 사람들은 길고양이에게 따뜻한 물을 챙겨주는 영상을 찍는데 왜 그의 세계 사람들은 길고양이 얼굴을 후려치는 영상을 찍을까. 내가 나의 세계가 옳고 당연하다고 믿는 것처럼 그도 그럴까. 세계는 다 고양이를 후려치는 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러니 그 손을 보며 그들과 함께 낄낄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까. 손쉬운 동조는 사유의 영역을 지우고 판단의 근거를 없앤다. 함부로 짜깁기된 무엇을 은은히 맹신하는 순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며 판단을 유보하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손이 된다. 어떤 신념도 각오도 없이 아무렇게나 타인의 얼굴을 후려치는 손이 되고 만다. 그는 대체 어떤 손을 가진 사람일까. 그날 느낀 좌절감과 단절감이 이상하고 또 기이해 나는 그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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