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정리하고 감정 표현
세상 바라보는 새안목 키워
“AI와 상생 피할 수 없는 대세
인간 언어 능력 향상 도구로
‘활용 적정선’ 고민해야 할 때”
쓰기의 미래/ 나오미 배런/ 배동근 옮김/ 북트리거/ 2만7800원
영국의 아동문학 거장 로알드 달은 1953년 단편 ‘자동 작문 기계’에서 수많은 어휘를 문법 규칙과 결합해 틀에 박힌 플롯에 넣으면 이야기를 만들어 주는 장치를 상상해냈다. 작문 기계를 발명한 소설 속 주인공 아돌프 나이프는 이 기계로 잘 팔리는 소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떼돈을 번다. 이 때문에 인간 작가들의 밥줄이 끊기게 됐다. 작품에서 달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누가 이야기 쓰는 기계를 원한다는 거야?”
2022년. 오픈AI(인공지능)는 충격적인 언어생성형 AI ‘챗GPT’를 세상에 내놨다. 출시 약 2년 만에 챗GPT는 창작·번역·언론·법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인간의 쓰기를 대체하게 됐다. 챗GPT가 단독 저자로 등재된 책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미국에서는 상당수 변호사가 소프트웨어 매니저나 AI가 작성한 초안의 사후 편집자로 그 역할이 변할 것이란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점쳐진다.
미국 아메리칸대학의 언어학 명예교수인 나오미 배런은 언어학자의 시각에서 AI의 언어 능력 발달사를 탁월한 솜씨로 개괄한다. 전작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매체별 ‘읽기’ 전략을 제시했던 배런은 이번엔 언어생성형 AI 시대를 맞아 ‘쓰기’에 대해 논한다.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논의를 전개한다. 상당수 학생은 글쓰기 과제를 준비할 때나 이메일·문자메세지를 작성할 때 오자와 맞춤법 검사, 문법 교정은 물론 낱말 자동완성과 단어예측 기능, 심지어 문체 설정과 문단 배열에 이르기까지 AI 프로그램을 활용한다고 답했다. AI가 대체로 실수를 잡아주고,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유려한 결과물을 만들도록 도와준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학생들의 응답에선 기계가 글쓰기와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지점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단어예측 기능으로 쓴 글을 보면) 잘은 모르지만 (…) 내가 너무 단조로운 글을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쓴 것 같지 않아요.” 섬뜩한 대목이다. AI가 제안하는 최적화된 추천 경로를 따르기로 각자가 판단했지만, 그 선택의 결과 내 글은 나의 삶의 결과나 느낌을 담아내는 표현과 문장과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묻는다. 과연 글쓰기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글을 쓰는가.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우리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지식과 전문적 의견을 나누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힘을 준다. “글을 통해 우리는 바깥 세계를 탐색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AI가 언어 분야에서 선보이는 비약적 발전은 인간의 쓰기 행위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라고 긴급 경보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AI와의 상생을 피할 수 없는 시대. 이제 문제는 글쓰기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적정선은 어디인가 하는 점에 있다.
저자는 또다시 묻는다. 이 압도적인 AI라는 기계와 어떤 과제를 공유해야 할까. 어떤 부분을 AI에게 양도하고, 어떤 부분은 인간만의 자산으로 남겨두고 수호할 것인가. 그는 AI 글쓰기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기계가 대신 살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현대인이 AI가 주는 여러 편리한 기능을 굳이 활용하지 않을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직접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고양하며 타인과의 공감대를 키우고 인류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동차 성능이 고도화돼 평행주차 기능이 추가되면 인간이 늘상 하던 주차 능력이 퇴화하듯, 지나치게 AI의 언어능력에 기대다 보면 언어능력이 퇴화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AI와 협업하되, 인간으로서 쓰기에 대한 주권을 지켜내는 것. 이러한 저자의 핵심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AI의 능력을 주의 깊게 감시하며 자신의 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품게 된다. 구체적 행동 전략들은 덤으로 따라온다.
AI와 연합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유성을 고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독려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글쓰기는 인간의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고, 다른 사람과 이어주는 ‘마법검’이다. 아무리 도우미로서의 AI가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그 검이 빛을 발하도록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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