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에 디프(딥)스테이트가 있음은 불보듯 명백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기사다. ‘딥스테이트’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 어느 나라에나 있는 ‘관료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과장, 비난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집중적으로 언급하는 개념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미국을 움직이는 존재’로, 트럼프식 음모론의 냄새를 덧입힌 용어다. 조선신보에 트럼프의 음모론에 적극 동조하는 기사가 실린 셈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북한 관련 매체나 당국 움직임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에 대한 묘한 기대의 기류가 읽힌다.
◆트럼프 당선 첫보도에 등장한 ‘딥 스테이트’
지난해 11월 25일 조선신보에는 ‘디프스테이트와 바이든’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이번 미 대통령 선거에서 해리스가 트럼프에게 압도적 표차로 대패하자 대통령 후보 자리에서 밀려났던 바이든이 흉악한 본성을 낱낱이 드러냈다”며 바이든 정부의 외교적 결정을 맹비난했다. 가자 휴전 결의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장거리마시일을 사용하도록 허가한 결정을 비난하며 “그 배후에 디프스테이트가 있음은 불보듯 명백하다”고 했다. 북한 당국의 직접적 입장이 아니지만, 북한 관련 매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한 미국 대선 결과를 처음으로 언급한 기사였다.
미국통 외교관 출신인 조병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교수는 최근 저서 ‘트럼프의 귀환’에서 “트럼프가 말하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았으면서 정부라는 기관에 소속돼 정부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보이지 않은 권력집단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조선신보에 대해 “북한판 지라시“라며 북한 당국 입장과의 긴밀한 연계성은 깎아내리는 전문가들도 있지만, 북한 입장 대변을 ‘자처’하는 매체에 실린 기사로서 북한 사회 안팎의 트럼프를 향한 전폭적 지지와 당선 환영 기류가 읽히는 측면도 있다.
◆트럼프 구애에 김정은 침묵이란 대답
그런 가운데 1월 22일로 예정된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로 대미메시지가 나올지 전문가들은 주목했다. 통상 1월 1일쯤 열리던 것과 달리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하는 1월 20일 후에 최고인민회의 일정을 잡은 것부터 의도가 다분해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월 24일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2차 회의 결과 기사에서는 김 위원장이 회의에 불참했고 신년사도 없었으며 대미 메시지도 나오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침묵’으로 대답한 셈이다. 비난도 환영도 아닌, 관계 단절도 대화의지 천명도 아닌 ‘침묵’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행보로 보인다.
특히 2021년 북한의 8차당대회에서 정한 5개년계획(2021∼2026)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북한의 공식적 대외정책 기조 전환이나 움직임이 유연하지 않고 내부 계획에 따라, 당국 의지가 우선해 주도하는 ‘주체적 연출’이 중요함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최고인민회의 보도에선 2025년을 “당 창건 50돌, 제8차 대회의 결정을 완결하는 역사적인 해”로 의미가 한껏 강조됐다. 2025년은 공식적인 대미 입장 변화나 대외 기조 변화가 천명되기 보다는 물밑대화, 탐색전의 해가 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지난 26일 ‘해상(수중) 대 지상 전략 순항 유도 무기 시험발사’ 보도에서도 “(김 위원장이) 공화국 무력의 전쟁억제 수단들은 더욱 철저히 완비돼가고 있다”고 했다며 우선 내부 목표 달성을 우선 강조하면서, 동시에 목표 달성 막바지에 와 있다는 메시지가 강조됐다.
또 이날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나온 북한 당국 입장인 ‘북한 외무성 보도국 대외보도실장 담화’에서는 강경한 어조이면서도 북·미대화를 위한 선결 조건을 제시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겼다. 담화는 한·미가 진행한 연합훈련을 비난하며 “(한·미연합훈련은)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주권과 안전이익을 거부하는 이상 미국과는 철두철미 초강경으로 대응하여야 하며 이것만이 미국을 상대하는데서 최상의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해주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주권인정과 연합훈련 중지를 촉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최근 펴낸 이슈브리프에서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주목할 점은 김 위원장이 불참하고 대외정책, 군사 관련 언급이 거의 없거나 축소됐고 경제와 민생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올해 당 창건 80주년과 차기 9차 당대회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경제와 민생분야 성과 도출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 하에 2025년이 갖는 중요성을 고려, 외부와 긴장과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관리하면서 경제발전과 내부 문제 해결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또 대미관계와 관련 “당분간 ‘수위가 조절’된 자위적 핵무력 고도화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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