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완화 주장도 믿음 못 줘
철학 축적 안 됐고 소신 없다면
‘흑묘백묘론’은 거두는 게 마땅
‘좌파 신자유주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보수는 물론 진보로부터도 공격받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자조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도 노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관철했다. 이라크 파병과 제주해군 기지 건설도 밀어붙였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층인 노조와 진보시민단체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정면돌파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히 했지만, 국정에서만큼은 이같이 이념보다 국익을 우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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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의 단심은 2007년 4월 한·미 FTA 타결 대국민 담화에서 “대통령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지만, 소신과 양심을 갖고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내린 결단”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2012년 한·미 FTA 발효 이후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에는 557억달러(81조원)에 달했다. 지금 그가 보수·진보 양쪽에서 평가를 받으며 전직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늘 1, 2위를 다투는 데는 이런 면이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노 전 대통령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표방한 실용주의 행보와 대비되는 점이 많아서다. 이 대표는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용주의 행보는 영 딴판이다. 최근 중도층 표심을 겨냥한 ‘흑묘백묘론’을 내세웠지만, 이 대표의 실용 행보는 오락가락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말이 바뀌고, 왜 바뀌었는지 설명도 없다.
‘주 52시간 예외 허용’만 해도 그렇다. 이 대표는 애초 주 52시간제 유연화에 강하게 반대했으나 조기 대선이 가시화하자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며칠 전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다시 말을 뒤집었다. 기본사회 공약도 갈지자 행보다. 이 대표는 지난달 신년회견에서 ‘기본소득’ 정책 재검토를 언급했으나 지난 10일 국회연설에서는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전 국민 25만원 지급’ 문제도 보름도 못 가 말이 바뀌었다. 지난달 31일 “전 국민 25만원 때문에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못 하겠다고 하면 이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은 35조원 규모의 추경 예산안을 제안했고, 이 중 13조원이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원을 지역 화폐로 나눠 주자는 ‘민생회복 소비쿠폰’이다.
가장 납득 못 할 행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노벨평화상 추천이다. 이 대표는 14일 공개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하는 것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반미 이미지를 희석하고 트럼프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대표는 2021년 대선 후보 당시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말한 적이 있고, 지난해 총선 때는 “왜 중국에 집적거리나. 그냥 ‘셰셰’이라면 된다”고 했다. 이랬던 이 대표의 갑작스러운 변신은 당혹감을 안겨줄 정도다.
이 대표는 지난해 당 대표 출마 때도 성장과 ‘먹사니즘’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 행보는 교조적 진보의 노선에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전 국민 25만원 지원금과 남아도는 쌀 매입법 등을 밀어붙인 게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 15일에는 “세금 때문에 집을 팔고 떠나지 않게 하겠다”며 중산층의 상속세 완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대표 주장대로 법이 개정되면 최대 18억원까지 세금 부담을 덜게 된다. 하지만 진정성에 의문이 간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 대표는 정치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1위를 달리지만, 비호감도 역시 높다. 잦은 말 바꾸기가 결정적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정치인도 말이 바뀔 수 있지만, 이 대표는 너무 그 빈도가 잦고 변화 폭이 크다. 노 전 대통령은 자기 말을 바꿔야 할 경우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장시간에 걸쳐 설명하고 설득했다. 이 대표는 그런 과정도 없다. 국정의 근간이 되는 주요 정책이 이런 식으로 조변석개하면 이 대표의 자질과 성품에 중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표가 지지층의 반발에 맞설 정도로 철학이 축적되지 않았고 소신이 없다면 어설픈 ‘흑묘백묘론’은 이쯤에서 접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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