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는 단순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권력의 반영이다.”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 존 브라이언 할리의 말이다. 북쪽을 위로, 남쪽을 아래로 지도를 그리는 것도 인위적인 규칙이나 통념일 따름이다. 구형의 지구에서 위·아래는 보기 나름이다. 고대 이슬람 세계에서 최고 성지인 메카가 위치한 동쪽이 위였고 중세 유럽에서도 종교관에 영향을 받아 동쪽이 위인 지도가 쓰였다고 한다. 유럽과 북미를 위쪽에 그리는 것에도 서구 중심주의가 녹아있다.
1979년 호주에서 세계 지도를 뒤집는 반란이 벌어졌다. 호주 학자 스튜어트 맥아더는 호주를 위쪽 중앙에 크게 그린 ‘거꾸로 지도’를 선보였다. 아프리카와 남미, 오세아니아가 위쪽에 배치됐고 유럽은 오른쪽 하단 구석에, 미국도 왼쪽 하단에 놓였다. 맥아더는 “남반구가 더는 북반구를 어깨에 짊어진 채 비천함의 구덩이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정부도 이에 호응해 이 지도를 적극 활용했다.
약 20년 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1996년 길광수 박사는 한국을 중심에 둔 거꾸로 지도를 고안했고 원양어선 선장 출신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이를 대중에 널리 알렸다. 김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반도는 더 이상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반도가 아니라 드넓은 태평양의 해원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모습”이라고 했다. 해양수산부도 2007년 해양강국의 비전을 알리겠다며 이를 보완한 세계 지도를 만들었다.
주한미군이 올해부터 이와 닮은 듯 다른 지도를 제작해 자체 교육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도에서 중국 해안선과 가까운 대만과 필리핀이 눈에 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있는 평택기지를 기점으로 베이징, 평양, 타이베이, 도쿄 등까지 직선거리도 표기돼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이 지도를 보지 않으면 왜 전략적 유연성이 절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거나 남중국해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주한미군을 움직이겠다는 얘기다. 60여년 전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안보는 타인의 선의에 맡길 수 없다”며 핵무장을 강행했다. 우리도 ‘드골의 순간’에 필적하는 결기와 준비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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