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허자(步虛子)’. 제목처럼 ‘허공을 걷는 자’인 신선을 만나 불로장생을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 시대 궁중 연례악이다. 조선 시대 왕이 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후 베푸는 잔치에서 연주되곤 했는데 1∼3악장 중 1, 2악장에만 가사가 있고 3장은 현재 선율만 전해진다. 그런데 국립국악원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서 3장에 다음과 같은 가사를 붙였다. “상망기차원(相望祈此願·서로 바로 보며 이를 기원하리라) 제단봉헌지영속(祭壇奉獻志永續·제단에 올리는 정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왕은달어태평성세(王恩達於太平盛世·왕의 은혜는 태평성세에 달리리라).”
전통을 엄수하는 데 치중해오던 국립국악원이 그야말로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에 나선 것이다.
국립국악원은 지난달 25일 정악단 연습실에서 ‘행악과 보허자’ 제작 발표회(사진)를 열어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13∼14일 정기공연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에 선보일 보허자 공연은 2016년 이후 9년 만이다.
국악원은 정악을 외연적으로 확장하고 연례악의 웅장한 멋을 전하기 위해 3장 가사를 박진형 아트플랫폼 유연 대표와 서울대 국악과 석박사 등을 통해 창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오픈AI의 챗GPT와 메타의 AI 모델 ‘라마’에 가장 많은 글을 남긴 축에 속하는 조선 효명세자 한시 350편을 학습시켰다. 이어 대조군으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한시 100여편을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AI가 만들어낸 가사는 정기공연에서 70여명의 가객이 부르게 된다. 이건회 정악단 예술감독은 “가객 70여명에 우리 연주단을 포함하면 100명 넘는 사람이 함께해 웅장하고 멋진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국악원은 연주곡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 작업도 했다. 왕의 역할을 맡은 무용수가 등장하고 관악기 나발의 모습에서 백성의 한숨 소리를 떠올려 무대를 꾸미는 식이다. 김충한 무용단 예술감독은 “(공연이) 끊기지 않고 드라마 요소를 갖도록 했다”며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만큼 관객들이 (공연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군주는 어떤 모습일지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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