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1636년)은 우리에겐 치욕의 역사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청나라 두 번째 황제 홍타이지다. 그는 당시 막강했던 명나라와의 전쟁을 치르던 중 조선 정벌에 나섰다. 조선의 왕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고는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에서 청 황제를 대하는 인사법인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를 하는 치욕을 맛본다. 홍타이지의 오만함, 약소국을 향한 무시와 경멸이 깔렸다.
중국의 모욕 주기 외교는 현대에서도 재연된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초청으로 3박 4일 동안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다. 문 대통령은 둘째 날 시진핑 주석과의 만찬, 넷째 날 천민얼 충칭시 당서기와의 식사를 제외하곤 다른 중국 측 인사와 한 끼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열 끼 중 여덟 끼’를 ‘혼밥’(혼자 밥 먹기)했다고 한다. 지난해 문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이를 두고 “외교를 후지게 만드는 일”이라고 반박했지만, 국민의 뇌리에는 중국이 의도적으로 푸대접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덩달아 반중 정서도 나날이 증대됐다.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궁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매듭짓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패전국 독일은 영토의 15%와 수많은 국민을 잃었다. 승리한 연합국의 막대한 배상금 요구에 독일 경제는 거덜 날 지경이었다. 국민적 반감이 커졌고, 나치가 급부상했다. 이후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이 느낀 모욕감과 절망, 복수심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지난달 28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렸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 파문이 이어지고 있다. 우방국 정상 간에 무례와 고성, 설전이 오가며 약 40분 만에 파국을 맞은 탓에 근래 외교사에서 찾기 힘든 충돌이라는 반응이 작지 않다.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트럼프 행정부가 제안한 우크라이나 광물 협정 요구에 대해 “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사유조약보다 심하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파국의 불똥이 어떻게 튈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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