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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곡마다 피어난 웃음·사랑·해학… ‘폭싹’ 빠졌수다

입력 : 2025-03-10 21:00:00 수정 : 2025-03-10 1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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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1951년생 제주 여자 애순과
든든한 버팀목 관식의 삶 다뤄
눈칫밥 먹고 희생으로 점철
눈물 쏙 빼지만 웃음도 선사
아이유, 애순과 딸 1인 2역

임상춘 작가, 말맛 잘 살려
주변 인물들도 제 몫 톡톡
한국·베트남 등 9개국서 1위

“인생이 얼마나 떫은 귤을 건네든, 그걸로 귤청을 만들어내는 드라마.”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폭싹’)의 주연 아이유는 지난 5일 제작발표회에서 작품의 색깔을 이렇게 설명했다. 16부작인 이 드라마의 1∼4회가 7일 최초 공개됐다. 그리고 아이유의 표현이 과장이나 허언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1960년 이래 한국의 근현대를 살아낸 이들의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설탕을 적절히 쳐 버무렸다. ‘폭싹’ 속 인물들의 삶은 기구하되 처연하지 않다.

◆험한 삶에도 웃음은 피어나고

아이유가 연기한 1951년생 제주 여자 오애순에게는 ‘시대가 빌런’이다. 유년기에 아빠를 여의고, 엄마 광례(염혜란)는 애순을 떼놓고 재가했다. 작은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처지인데, 식구들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애순에게만 조기 반찬이 오르지 않을 만큼 차별받으며 눈칫밥으로 자란다. 모두가 잠든 밤, 귀한 전복을 남몰래 애순의 입에 넣어주던 잠녀(해녀) 광례는 고된 물질 끝에 병을 얻어 29세에 사망한다. 애순의 나이 고작 10세 때다. 한량 새아버지 염병철(오정세)은 어린 두 의붓동생을 돌보고 집안 살림하는 식모로 애순을 써먹는다. 시인을 꿈꾸는 총명한 문학소녀 애순을 “장차 서울로 대학 보내주겠다”는 헛말로 구슬리면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의 젊은 시절은 아이유, 중년은 문소리가 연기했다. 청년 ‘관식’은 박보검, 중년은 박해준이 연기했다. 여기에 김용림, 나문희, 염혜란, 오민애, 오정세, 엄지원 등 빛나는 조연들의 호연이 애순과 관식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더욱 다채롭게 채운다. 넷플릭스 제공

애순은 동생들 밥 먹이고 농사짓고 양배추를 시장에 내다팔며 십대 시절을 다 보낸다. 대학 등록금 대주겠다는 병철의 약속이 헛말일 뿐임이 밝혀지지만, 애순에게는 달리 의지할 어른이 없다. 생전 광례를 ‘남편 잡아먹은 여자’로 몰고 조카를 구박하던 작은아버지는 애순을 육지에 ‘공순이’로 보내고 월급 절반을 받아챙길 궁리를 한다. 애순은 평생의 연인 관식(박보검)과 육지로 야반도주를 택하지만, 십대들의 순진한 계획은 첫날밤을 지나며 처절한 실패로 돌아간다. 청춘남녀의 에피소드를 둘러싼 소문은 좁은 지역사회에 추문으로 입길에 오르고, 열여덟 애순에게는 어느새 ‘시집 다녀온 여자’라는 낙인이 덧씌워져 버린다. 답답해서, 억울해서, 세상이 내 것만 빼앗아가서. 어린 애순은 많이도 운다.

 

그런 애순에게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건 관식이다. 우는 애순 곁을 지키며 관식은 말한다. “울면 배 꺼져. 먹으면서 울어.” 촉망받는 운동선수인 ‘무쇠’ 관식은 10살 때부터 일관되게 애순만 맴도는 지고지순 애순 바라기다. 3회 어린 애순(아역 김태연)과 관식(아역 이천무), 물질을 마친 해녀 여덟 명의 바닷가 대화 장면은 캐릭터를 명확하게 보여주면서도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어촌계장도 내가 해먹고 대통령도 다섯 번 해먹을건데.”(애순) “기여, 허라, 해! (…) 이럴라면 하나 달고나 내보내시지 간장 종지만 하면 될 지집(계집)아이 속에 어쩌자고 장항아리를 묻어 두션이.”(해녀 양임·이수미) “타고난 그릇이 장항아리면 그거 어떡해. 대통령 해묵어야지.”(광례) “해라 해, 여기 여덟 표는 확보다.”(해녀 경자·백지원) “아홉 표.”(관식) (…) “기쥬(그렇지), 아홉 표, 응. (…) 너는 뭐 될 건디?”(양임) 그 물음에 관식이 “영부인”이라고 답하자 모두 폭소를 터뜨린다.

 

노인들의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야’라는 말이다. 가는 자리마다 고비였고, 우는 것이 일이었던 고난의 세월을 살아낸 제주 여인들은 ‘살암시면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어찌저찌 살아지기는 했지만, 지나고 보니 굽이굽이 걸어온 길은 소설 열 권짜리 가시밭길이었다. 질곡 속에도 웃음은 피어났고, 풋풋한 사랑도 머물렀다. ‘폭싹’은 그런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어떤 감정도 쉬이 흘려보내지 않는다.

◆살아 있네, 임상춘표 말맛

‘폭싹’은 ‘동백꽃 필 무렵’(2019)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임상춘 작가의 차기작이다. 임 작가 특유의 입에 쩍쩍 달라붙는 맛깔난 대사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4화까지 전개에서 말맛 좋은 대사와 빼어난 연기로 시청자의 눈물을 쏙 뺀 장면들은 대개 광례와 애순, 애순과 금명 두 쌍의 모녀관계에서 나왔다.

 

광례는 딸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기 위해 악착을 떠는 엄마다. 탐욕을 부린다는 손가락질에도 “귀신이 무섭나? 자식이 무섭지. 저승 돈 벌어와 이승 자식 쌀독 채워놓을란다”라고 응수한다. 애순이 급장선거에 나가 당당히 1등을 하고도 학급에 크림빵을 돌린 부잣집 남자아이가 급장이 되자 광례는 동서네 밭을 대신 갈아주고 빌린 진주목걸이를 차고서 학교로 찾아간다. 담임 선생에게 촌지를 쥐여 주고 집으로 향하는 길, 광례는 딸을 다독인다. “엄마가 가난하지, 니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

애순 아역(김태연). 넷플릭스 제공

애순도 커서 열아홉에 딸 금명을 낳는다. 금명을 잠녀로 만들어 한밑천 삼겠다는 시할머니 막천(김용림)과 시어머니 계옥(오민애)에게 애순은 악을 쓰고 반항한다. “소박놓으라”는 막천의 고함을 뒤로하고 애순과 관식은 그 길로 분가한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고단한 밥벌이를 하며 둘은 진정한 부모로 다시 태어난다.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지는 못했지만, 금명은 멋진 대학생으로 성장한다.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래서 몰랐다. 내게는 허기지기만 하던 유년기가, 그 허름하기만 한 유년기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든 요새였는지.” 대학생 금명을 1인2역으로 연기하는 아이유의 내레이션으로 중년 애순(문소리)과 관식(박해준)에게 전하는 고백이다. 이 작품이 이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해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애순과 관식이 첫 아이를 가진 서툰 부모에서 자식에게 믿음을 주는 존재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폭싹’은 주변 어느 한 명의 인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애순에게 사사건건 호통을 놓는 막천을 통해 그 시대를 대변하는 가부장제를 체화한 여인상을 드러낸다. 병철의 재혼 상대 민옥(엄지원)은 입체적 캐릭터로 쾌감을 선사한다. 중간중간 나문희, 강말금 등 반가운 얼굴들이 수시로 등장해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폭싹’ 고유의 말맛과 한국적 정서가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까지 전해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지표는 있다. 10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 시청 순위 집계 사이트인 플릭스패트롤을 보면, ‘폭싹’이 이 사이트가 시청 기록을 집계하는 93개국 전체에서 9일 하루 동안 가장 많이 시청한 TV프로그램 6위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 9개국에서는 이날 1위를 차지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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