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영국에서 제1회 인공지능(AI) 안전 정상회의가 열렸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를 비롯해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이 직접 회의에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화상으로 참여해 디지털 국제 규범 정립을 위한 국제사회 연대와 국제기구 설립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회의 후 세계 28개국과 EU는 AI가 초래할 지도 모를 심각한 피해를 막기 위한 협력을 다짐하는 내용의 ‘블레츨리(Bletchley) 선언’을 채택했다.

왜 블레츨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는 회의가 열린 장소가 런던 북서쪽에 있는 블레츨리 파크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18세기 초 준공된 개인의 사유지였는데 지금은 영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변경됐다. 2차대전 발발 전부터 영국은 나치 독일의 부상을 극도로 경계했다. 훗날 총리에 오른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장차 독일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영국군은 잠재적 적군인 독일군의 암호 해독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2차대전 발발 한 해 전인 1938년 블레츨리 파크에 독일군 암호를 풀 요원들로 구성된 비밀 부대를 창설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며 블레츨리 파크 요원들은 바빠졌다. 영국군이 도처에서 가로챈 암호화된 독일군 메시지가 속속 블레츨리 파크에 도착했다. 흔히 ‘에니그마’라고 불린 독일군 암호 체계는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웠으나 영국군 비밀 요원들은 마침내 이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도 블레츨리 파크 소속으로 에니그마를 뚫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덕분에 영국군은 독일군 공세가 예상되는 시기와 지점을 미리 파악해 대비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물론 물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블레츨리 파크에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여성들도 많이 근무했다. 1923년 태어나 18세 나이에 영국 육군에 자원 입대한 베티 웹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처음엔 독일군 암호 해독에 투입된 그는 일본과 미국의 참전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일본군 암호를 푸는 임무로 전환됐다.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으로 보내져 미군 요원들과 함께 일본군 암호를 해독하기도 했다. 2차대전 기간 블레츨리 파크의 추축국 암호 해독은 전후 30년이 지난 1975년까지도 비밀에 부쳐졌다. 그래서 웹의 부모는 딸이 암호 해독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지난 3월31일 101세를 일기로 타계한 웹의 명복을 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