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정찰 임무를 완수해 아군의 전략적 핵심 고지 확보에 기여한 도태철 육군 중위를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도태철 중위(전투 당시 계급 소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30기(통신간부후보생 제11기)로 입교, 1951년 9월 1일 소위로 임관해 제6사단 제7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제6사단은 중부 전선을 담당하던 미 제9군단의 우익 부대로 1951년 10월 강원도 김화군 일대의 교암산과 금성 지역으로 북상 중이었다.
제6사단의 빠른 진격으로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 사이에 간격이 벌어져 적군이 침투할 수 있는 약점으로 지목됐고, 미 제8군 사령부는 전선을 정비하기 위해 개리(Gary)선을 설정하고 제6사단에 해당 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리선 확보 작전은 쉽지 않았다. 해당 지역은 북한강 상류의 물살이 세고 변화가 심했다. 중공군이 방어에 유리한 주변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고지들을 차지하고 있어 아군이 반격당할 가능성이 컸다. 개리선의 핵심 거점인 949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정찰과 공격이 필요했다.
1951년 11월 17일 새벽에 도 중위는 연대의 도하 지점과 적의 위치, 병력, 무기 등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대원 5명과 함께 적진으로 침투했다.
그는 강변에 높이 2미터의 강둑이 길게 형성된 것을 확인한 후 소대원 2명을 강변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강둑을 넘어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강둑에 설치된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를 발견한 도 중위는 해당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소대원들에게 연대본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도 중위는 자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홀로 적진 깊숙이 향했으나,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연대에 복귀한 소대원들은 적의 상황이 기록된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전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군은 신속하게 도하작전을 전개해 949고지 확보에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41명 전사, 포로 생포 13명, 박격포와 기관총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정부는 도 중위의 공훈을 기려 1952년 5월 소위에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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