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안보윤의어느날] 여백을 읽는 시간

관련이슈 안보윤의 어느 날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5-06 23:15:08 수정 : 2025-05-06 23:15:07

인쇄 메일 url 공유 - +

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 지근거리에서 대화하고 있는 학생들의 말은 너무 빠르고 거칠다. 이마를 벌겋게 물들인 채 누군가를 험담하던 청년들이 시그니처 메뉴가 테이블에 놓이자마자 환호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순간은 언제 봐도 생경하다. 어느 플랫폼에 들어가든 물소 떼처럼 내달리는 영상에 한 번 휩쓸리면 내가 뭘 보려고 했는지조차 잊게 된다. 사람들의 말과 감정, 끝없이 이어지는 영상들이 내겐 너무 빠르고 어렵다. “나이 때문이지 뭐. 요즘 젊은 애들 속도를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냐?”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튜브를 즐겨 보고 유행하는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번은 러닝타임이 100시간도 넘는 서바이벌 시리즈에 대해 얘기하길래 잠은 제대로 자고 있냐고 물었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당연히 유튜브 요약본으로 봤지. 그걸 언제 다 보고 있어.”

드라마 한 회를 15분짜리 요약본으로, 예능코너를 2분짜리 편집본으로, 퍼포먼스 무대를 15초짜리 쇼츠로. 요약과 편집을 거듭할수록 맥락과 여백이 사라져 마지막에 남는 건 파격적이고 납작한 이미지에 가깝다. 이런 걸 ‘봤다’고 해도 좋은 건가? 요약본마저 1.5배속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숨이 찰 지경이다. 어느 영화를 보러 갔을 때에도 비슷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30분 간격으로 상영되고 있던 영화였는데 보는 동안 나는 자주 눈을 감았다. 유튜브 쇼츠를 백 개쯤 이어 붙인 것 같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새까만 화면에 이르러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은 나와는 숫제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친구 말대로 ‘요즘 젊은 사람들의 속도라면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이게 대체 무엇을 위한 속도인지 말이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잠시 숨을 고른다. 습도가 높고 흐린 날씨지만 이런 날은 내가 내린 맛없는 커피도 제법 그윽하게 느껴지니 나쁘지 않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골라 소파에 앉는다. 미색의 종이 위에 고르게 인쇄된 글자들을 더듬어 본다. 글자 옆으로 느슨하게 펼쳐진 여백,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으니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는 그 인심 좋은 공간을 나는 몹시 사랑한다. 가령 나는 “외할머니의 팔순 잔치에 외할머니가 참석하지 않았다”라는 문장과 맞닥뜨리면 행간으로 빠져나가 그곳에 오래 머문다. 짧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단단하게 묶던 내 할머니를 떠올리고 그렇게 모은 머리카락이 고작 메추리알만 하던 것을 떠올린다. 책을 읽는 시간이란 내게 그렇다. 마주한 문장을 곱씹으며 행간을 거니는 일. 어떤 재촉도 없이 여백을 마음껏 거닐다 다음 문장으로 가만히 옮겨가는 일. 가끔은 촌스럽고 우직한 속도로 세계를 읽어나가던 옛날 사람들이 그립다. 마침표 없는 여백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몇 글자 낙서로 남던 그들의 발자국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안보윤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전지현 '눈부신 등장'
  • 전지현 '눈부신 등장'
  • 츄 '상큼 하트'
  • 강지영 '우아한 미소'
  • 이나영 ‘수줍은 볼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