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실질소비 지출 4년 반 만에 감소
지갑 닫으며 ‘일상속 특별한 경험’ 집중
백화점·골프장 안 가고 車 구매도 줄여
‘빵지순례’ 등 취미·여가에 꾸준한 소비
티켓 구입 다른 연령선 줄 때 11% 급증
전 세대 소비 줄면서 저축액 증가 추세

경기 수원에 사는 직장인 박모(27)씨는 ‘말차 마니아’다. 부쩍 오른 점심 밥값을 줄이려 매일 회사에 도시락을 싸 가지만,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유명한 말차 디저트를 맛보러 주말마다 서울행을 택한다. 박씨는 “1∼2년 전만 해도 백화점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런 취미가 돈도 적게 들고 훨씬 더 만족스럽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불황기에 청년세대가 지갑을 닫고 저축을 늘리면서 ‘일상 속 특별한 경험’을 줄 수 있는 소비에 집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이나 자동차 구매 등 크고 불필요한 소비는 줄인 대신 줄 서서 먹는 빵집, 공연·전시 티켓 등에는 돈을 기꺼이 지출했다.
12일 NH농협은행이 발표한 ‘NH트렌드+ 보고서’ 15호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 같은 소비 패턴이 특히 두드러졌다. 이는 지난해 1월∼지난 6월 농협은행·카드 및 하나로마트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최근 국내 소비자들은 대체로 지갑을 닫는 추세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가구당 월평균 소비 지출은 283만원 수준으로 전년 동기보다 0.8% 늘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실질소비 지출은 1.2% 줄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 4분기(-2.3%) 이후 4년 반 만에 가장 큰 감소 폭이다.
씀씀이가 위축된 것은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2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506만5000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2.1% 늘었지만, 물가상승률을 반영하면 실질소득이 0.03% 늘어나는 데 그쳤다. 증감률은 지난해 1분기(-1.6%)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농협은행에 따르면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 대비 올해 상반기 농협카드 결제 건수는 총 0.7%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특히 백화점(-3.1%), 노래방·주점 등 유흥업종(-8.7%), 골프장(-5.2%), 자동차 및 오토바이판매점(-5.5%) 등 비교적 금액이 크고 필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같은 사치재 영역에서도 청년층을 중심으로 취미나 여가생활에 대해서는 꾸준한 소비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를 비교해 보면 20·30대는 티켓판매업(온라인 예매사, 공연·축제위원회 포함)에서 11% 더 많이 소비했다. 같은 기간 40·50대와 60대 이상이 각각 3%, 22% 소비가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이뤄진 소비 건수도 20·30대는 1년새 65%, 40·50대는 36%나 급증했다. 반면 60대 이상은 같은 기간 22% 급감했다.
경험을 더 중시하는 청년층의 소비 태도는 식품 영역에서도 나타났다.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를 놓고 보면 20·30세대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빵집인 파리바게뜨·뚜레쥬르에서 소비 건수가 12% 줄며 타 연령대(-1%)보다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대신 청년층은 직접 찾아가서 먹어야 하는 유명 빵집에서 지갑을 열었다. ‘빵지순례(빵+성지순례)’로 인기몰이 중인 대전 프랜차이즈 성심당은 20·30세대에서 소비 건수가 9% 증가했고, 타 연령대는 5% 감소했다. 평균 객단가 또한 프랜차이즈는 1만1940원에 그쳤지만, 성심당은 2만5770원으로 2배 이상이었다. 유명 빵집 브랜드 8곳(런던베이글뮤지엄·자연도소금빵·아베베베이커리·하레하레·하얀풍차제과점·스탠다드브레드·여수딸기모찌·코끼리베이글)에서도 20·30세대 소비 건수는 2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객단가도 2만1460원으로 높은 편이었다.

반면 일상적인 소비가 이뤄지는 일반음식업종에서 20·30대는 소비를 10% 줄여 40·50세대(-5%)나 60대 이상(-1%)보다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일반주점 소비는 25% 급감하며 타 연령대(-13%)보다 감소 폭이 컸다. 20·30대의 값싼 냉동간편식(+14%) 소비도 타 연령대(+5%)에 비해서 빠르게 증가했다.
청년층의 건강 중시 소비도 두드러졌다. 하나로마트 소비 데이터에 따르면 20·30대는 지난해 상반기 대비 올해 상반기 단백질음료(+53%), 저당·제로음료(+22%) 소비를 크게 늘렸다. 타 연령대는 같은 품목에서 소비액이 각각 0%, 17%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 같은 소비문화는 최근 ‘트리토노믹스(treatonomics)’라고 불리고 있다. ‘트리트(treat·대접)’와 ‘이코노믹스(economics·경제학)’를 합친 신조어로, 경기 침체 속에서 일상적인 비용을 줄이고 작은 사치를 통해 심리적 만족을 얻는 행동을 가리킨다. 불황기에 저렴한 사치재 판매가 증가하는 ‘립스틱 효과’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미국 CNBC방송은 트리토노믹스는 기분 전환만을 노리는 게 아니라 ‘잊지 못할 경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립스틱 효과에서 한 단계 진화한 개념이라고 짚었다.
한편 전 세대에서 소비가 줄며 저축액은 증가 추세를 보였다. 세대별 금융자산을 살펴보면 20·30대의 전체 저축상품 잔액(투자형 포함)은 지난해 상반기 대비 올해 상반기 15.1% 증가하며 40·50대(+8.6%), 60대 이상(+5.5%)보다 가파르게 성장했다. 특히 총 저축액 중 적금이 지난 6월 말 기준 47.2%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대내외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시기에 청년층이 안정적인 투자 전략을 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40·50대는 같은 기간 적금 잔액이 0.9% 감소하고 예금이 17.2% 늘었다. 지난 6월 말 기준 저축액 대부분을 입출금(36.0%)과 예금(30.3%)으로 보유했다. 60대 이상은 펀드·투자상품이 2.8% 줄고 예금이 11.7% 늘었다. 이들 또한 예금(43.2%)과 입출금(36.5%) 상품 비중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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