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향 관심 갖고 다시 다가서야
고려의 수도였고 조선의 유수부(留守府)였던 개성(開城)이 필자의 뇌리에 박힌 것은 외가댁의 어느 어른 덕분이다. 그분은 6·25전쟁 후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으로 오랫동안 인천에서 자그마한 점포를 운영하였다.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분의 살림집 겸 점포를 방문하면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물론 어른들 사이에서 그분을 두고 뒤에서 ‘개성 깍쟁이’라고 흉을 보았다. 그런 흉이 이북출신 월남인에 대한 편견인지 아니면 그분의 성격을 가리키는지 몰라도 내 인상으로는 그분은 근면 절검하는 건실한 가장으로 비쳤다. 필자 역시 어린 마음에도 실속 없고 허무맹랑한 인간에 대한 혐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은 필자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이후에도 나의 그런 개성 인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학부 시절 역사를 공부하면서 오히려 강화되었으니 송도삼절(松都三絶)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는 통일이 된다면 필자가 제일 먼저 접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 상업사를 공부하면서 조선 정부의 차별과 홀대에도 굴하지 않는 개성상인의 인삼 재배와 홍삼 교역 그리고 선죽교로 상징되는 정몽주의 충절은 개성 사람의 특징을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특히 개성상인은 근대 부기라 할 복식부기(複式簿記)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성 인삼업과 다양한 금융업을 유지·발전시키면서 조선인의 실업률이 가장 낮은 동네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래서인지 박근혜정부 시절 개성 관광에 참가하여 선죽교와 숭양전, 박연폭포, 개성공단 등지를 방문한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개성 사람들은 자신의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근대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자식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냈다. 그 가운데 근대 문인이자 아동문학가인 고한승(高漢承)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개성 출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문화의 세례를 받기 위해 도쿄로 유학을 갔지만 한국인이자 개성인으로서의 자존을 세우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송경학우회(松京學友會)를 만들고 유학생 사회를 주도해 갔다. 귀국 이후에는 가업을 잇기 위해 회사를 경영했지만 ‘고려시보(高麗時報)’를 창설·운영하면서 개성의 역사와 문화 등을 널리 소개하였다. 그것은 개성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일제에 빼앗긴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고 잡지 ‘어린이’ 편집을 맡았으며 수많은 동화를 창작하면서 아동문학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 개성의 인삼 재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1949년 10월 29일 만 47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70여 년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많은 실향민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고향의 역사와 문화를 점차 망각하고 있다. 언젠가 통일이 되든 양국체제로 나아가든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상호 갈등을 줄이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또 다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 개성 재정 3부작 논문을 발표한 필자 자신도 근대 개성의 역사를 연구하고 싶은 열정이 끓어오른다. 더욱이 분단 80년의 역사가 이전 5000년의 역사를 가릴 수 없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의 관심을 촉구한다. 그리고 개성 관광이 재개되길 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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