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공영방송인 영국 BBC는 2003년 당시 토니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정보를 왜곡·과장했다고 폭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에 큰 흠집이 났고 정치권과 시민사회도 들끓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정부가 거짓으로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었고 출처인 국방부 과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정확성보다 정부 비판의 쾌감에 취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결국 BBC는 회장과 사장이 다 물러나는 굴욕을 겪었다.
영국 왕실과도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4년 후 BBC는 다큐멘터리 예고편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촬영 도중 “왕관을 벗어달라”는 요구에 화를 내고 자리를 떠나는 영상을 내보냈다. 알고 보니 여왕이 촬영장에 들어오는 장면을 조작한 것이었다. 2015년에는 “여왕이 입원 중 사망했다”는 오보를 냈다. 앞서 1995년 젊은 기자가 위조한 은행 거래명세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속여 인터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번에는 지난해 10월 방영된 시사 다큐멘터리가 2021년 ‘미국 의사당 난입사태’ 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연설을 왜곡해 물의를 빚고 있다. 이 방송에는 트럼프가 “우리는 의사당으로 걸어갈 것이고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겠다” “지옥처럼 싸우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얼마 전 트럼프가 시차를 두고 했던 발언을 하나의 연설처럼 짜깁기해 폭동을 부추긴 것처럼 조작됐다는 내부 고발이 터져 나왔다. 화가 난 트럼프는 다큐멘터리 전면철회와 공식사과를 요구하며 10억달러짜리 소송까지 제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BBC 사장과 뉴스·시사 총책임자가 이미 사퇴했고 회장은 “판단 오류에 사과하고 싶다”고 물러섰다.
100년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BBC는 오랫동안 신뢰성과 공정성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을 처음 알리고 자국 이익과 상충하는 현안도 균형 있게 전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전쟁 때 자국 군대를 ‘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이라 불렀을 정도다. 그런 BBC조차 이제 ‘오보 공장’이라는 조롱을 받아야 할 판이다. 새삼 사실 검증과 진실의 무게를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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