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문화적 침략''"비판
◇세계일보 취재팀이 단독 입수한 진해 벚꽃 묘목 기증과 관련한 문건.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가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이 문건엔 1960년대 후반 이후 재일교포와 함께 일본인 15명과 9개 일본 기업이 묘목 기증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
당시 이같은 벚꽃 심기는 반일감정을 자극하며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확인돼 해방 20여년만에 벚꽃 심기가 다시 국민정서를 무시한 채 추진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진해 벚꽃의 ‘부활’, 국회를 감싸고 있는 여의도 벚꽃길, 일제시대 호남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가던 ‘수탈의 길’, 전군가도(전주∼군산 26번 국도)의 벚꽃길 등 상당수 국내 대단위 벚꽃 나무들이 이렇게 심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묘목을 기증했던 재일교포, 담당 공무원, 향토사학자들의 증언과 취재팀이 재일교포의 친지에게서 단독 입수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전라북도,진해시,군산지,전주시 등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기관엔 관련 기록이 전무했다.
이에 따라 ‘교묘한 문화 침투’라는 지적과 함께 이들, 특히 일본인들이 왜 한국의 벚꽃 심기에 발벗고 나섰는지 그 배경과 의도에 ‘역사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벚꽃 심기가 추진될 당시 국내에선 벚꽃 묘목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게 당시 실무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벚꽃이 곳곳에서 베어져나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취재팀이 입수한 당시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의 묘목 기증 명단과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76) 회장의 기록에 따르면 1966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벚꽃 묘목 약 6만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했다. 여기엔 재일교포 10명과 일본의 중견 언론인, 식물학자, 관광회사 간부 등 일본인 15명, 전자회사 후지쯔(富士通), 동경항공 등 9개 일본 기업이 협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기증을 주도했던 재일교포 문태일(76· 일본 사이타마현 거주)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왜 원수의 나라 국화를 기증하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증오심만 갖고는 한일 관계에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 기증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당시 일본 NHK에서 대한방송 뉴스 진행을 맡고 있었다. 문씨는 일본인과 일본기업의 협찬에 대해 “친분이 있는 언론인과 기업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름만 빌려줬을 뿐 실제 돈을 낸 사람은 몇 안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씨의 형 문시정(84·진해)씨는 “관광객 유치가 목적이었는데 일본인들이 기증에 나선 것은 진해가 러일전쟁 전승지인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벚꽃 묘목 기증이 이뤄질 당시 진해시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와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고시마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일본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해군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의 고향이다.
1970년대 초·중반 국회 뒷길에 심어진 벚꽃 묘목과 전군가도에 심어진 벚꽃 나무도 전부 또는 일부를 재일교포가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군산 월명공원의 벚나무 200그루는 일본 로터리 클럽이 기증한 것이란 증언이 나왔다. 군산시청 김중규 학예사(39)는 “전쟁후 일본인들은 과거 자기들의 식민지였던 지역에 자매결연이든 기술협약이든 인연이 닿게 되면 맨 처음 하는 일이 벚나무 기증이었다”며 “월명공원의 벚나무도 그렇게 기증된 것이란 얘기를 당시 군산에서 로터리 클럽 활동을 했던 분(사망)에게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문화적 침략’”이라며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일본이 한반도내에서 자신들의 과거 (침략자로서의) 문화적 향수를 구현하기 위한 욕심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기획취재팀=류순열·김기동·신동주·박종현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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