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보다 10분 늦을 것 같다는 전화에 안심하고 천천히 도착하던 참이었다. 2층에 위치한 카페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영화 '러브어페어'의 주제곡이다. 카페이니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피아노 앞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오르며 편안해진 마음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그 음악은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연주가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김정원. 그가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끔은 클래식 아닌 곡들도 연주해요. 방금 연주했던 ‘러브어페어’ 같은.”
느긋느긋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수줍게 웃는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활발한 연주 활동을 보여온 김정원은 최근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난해 12개 도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세번째를 맞이하는 '김정원과 친구들' 공연 준비에 한창이다. 앙상블 MIK의 활동 또한 쉬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신세대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얼마 전 아는 피아니스트 분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화의 주제는 ‘피아노는 너무 어려운 악기다’였어요.(웃음) 연주하면 할수록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악기예요. 수십 개의 선율과 화성, 모든 음표들을 챙기려면 정말 머리가 터지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빈 국립음대를 최연소 수석 입학했던 그가 마치 학교 시험이 너무 어렵다고 엄살피우는 우등생처럼 피아노가 ‘어렵다’고 말한다. 겸손일까. 잠시 헷갈려하는데 이 사람, 진지하다.
"요즘에는 점점 암보(暗譜)에 대한 부담감이 와요. 간단히 곡만 외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곡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끄집어 내야하는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죠. 단순하게 음표만 외우는 것이 아니니까 부담도 커지고.”
어린 시절 '소년 김정원'을 보며 어른들은 “어떻게 그 긴 곡을 다 외우니?” 하며 대견해했다. 그럴 때면 '소년 김정원'은 속으로 ‘별거 아닌데 신기해하네’ 생각했다. 연주를 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20분도 넘는 곡을 다 외워서 연주하니 그것 자체로도 기특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서야 피아노가 만만치 않은 악기임을 느낀 배경에는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과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김정원은 요즘 더 꼼꼼해졌다. 순간적인 실수가 생길 위험성이 느껴져 요즘에는 마지막 ‘확인 작업’을 한다. 잘 외웠는지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하고, 아내에게 악보를 주면서 혹시 틀리는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 부탁한다. 이럴 때는 함께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 덕을 많이 본다.
“아내도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옆에서 도와주고 지지해주니까 저는 굉장히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에요. 일부 사람들은 같은 음악을 하니까 부딪히는 일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단점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어요. 오히려 음악인끼리 살려면 같은 악기를 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빈 국립음대 재학 중이던 김정원은 같은 학교로 유학 온 한 살 연상의 아내를 만나게 됐고, 둘은 10여년의 열애 끝에 지난 2004년 결혼했다. 클래식계 '오빠 부대'의 원조로 손꼽히는 김정원과 그의 미모의 피아니스트 아내까지, 부부 피아니스트가 알콩 달콩 사는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김정원과 그의 아내의 미니홈피 방문자 수는 웬만한 인기 연예인 부럽지 않을 정도다.
김정원은 요즘 베토벤에 푹 빠져 있다. 쇼팽처럼 여과 없이 감정을 표출하는 작곡가에게 매료됐던 그는 최근 감정을 숨기고 절제하며 의연하게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작곡가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좋아하는 작곡가는 그때그때 달라요. 어느 시기에 특정 작곡가에게 매료될 때가 있죠. 그럴 땐 가슴이 두근거리고 연주할 때 눈물도 나고 그래요. 흔히 꽂힌다고 하죠. 요즘은 베토벤에 꽂혀 있어요. 제 연주 레파토리로 잘 안 다루었던 작곡가이고 음악적으로 해석이 어렵지만 꼭 무대에 올려보고 싶습니다.”
그는 베토벤에 대해서 ‘매우 존경하고 경외하지만 앞에서는 너무 어려워 감히 말도 못 붙이는 어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꼭 친해지고 싶은 존재다.
팬 많기로 소문난 김정원은 음악감독인 이병우와의 친분으로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출연하고 나서부터 더 유명세를 탔다. 또 친분이 있는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김정원과 친구들’은 이번에 세번째를 맞아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비올리스트 김상진, 첼리스트 허윤정,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노영심, 가수 양파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 걱정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생각보다는 내가 내 자신을 지키고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일부에서는 제가 영화도 출연하고, 연예인들하고 친분도 있고 하니까 ‘어 김정원, 자꾸 딴 일하네’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모든 활동의 이유는 하나예요.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갈까. 대중과 어떻게 음악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까. 젊은 음악가들이 많이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대중 가수들하고 한 무대서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연히 가수 김동률의 콘서트 출연하게 됐고, 그것으로 그는 엄청난 것을 실감했다고 말한다. ‘김동률 공연을 보러왔다가 생전 처음 클래식 무대를 접했다’는 사람이 점점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클래식 마니아’로 성장하는 경우도 보았다. 김정원이 아니어도 다른 경로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겠지만, 그는 시간을 조금 앞당겼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이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어떤 무대 성격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대중을 많이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적인 균형을 지키려는 노력일까. ‘김정원과 친구들’ 공연은 1부는 김정원의 피아노 독주 등 정통 클래식으로 짜여있으며 2부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대중적인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사한다.
그의 다양한 활동에는 ‘타고난 무대 체질’의 성향도 큰 몫을 한다.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그를 두고 ‘무대 위에서의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쾌감으로 여기는 연주자’라고 말했다.
“무대를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만들어지는 부분도 많아요. 학생 때는 무대에서 정신없이 치고 내려와서, 콩쿠르 떨어진 적도 있거든요. 무대공포는 결국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체조 선수가 턴을 하다가 넘어지면 감점이 됩니다. 무용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걸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요. 무대 공포는 스포츠화 된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16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부산, 대구에서 열리는 '김정원과 친구들' 세번째 투어를 마치면 앙상블 ‘MIK’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올해 6월에는 미국 카네기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로 뉴잉글랜드 심포니와 함께 무대에 오르며 8월에는 체코 국제음악제 개막식, 또 9월에는 일본 도쿄 국제쇼팽페스티벌에 참여한다. 다양한 레파토리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음악을 즐길 줄 아는 피아니스트 김정원. 원숙미가 물씬 풍겨오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 두정아 기자 violin80@segye.com 팀블로그 http://com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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